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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생활백서-까라면 까세요


4.5초처럼 느껴지는 4박5일의 꿈 같은 백일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나는 다시 시작된 군생활을 부정하고 싶었다. 불과 전날만 해도 푹신한 침대에서 불침번 근무도 없이 푹 자고 일어나 어머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었다. 보고 싶었던 여자친구와 지인들과의 해후는 얼마나 즐거웠던가. 휴가 복귀 다음날, 취사장에서 아침으로 먹는 군대리아. 정말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등병이 먹기 싫다고 안 먹어도 되는 짬밥인가?  차디찬 현실을 반찬 삼아 꾸역꾸역 씹어삼키고 있었다.
이미 똑같은 경험을 한 고참들은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가츠야, 군대리아(군용 햄버거) 맛있지? 내 것도 먹어. 많이 먹어.”
“이병 가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머시라? 괜찮다고? 이 색히, 휴가 갔다오더니 배가 불렀네, 불렀어. 이제 고참이 주는 것도 안 먹는다? 우리 가츠 변했어. 무엇이 가츠를 변하게 한 거지?”
그렇게 주말 내내 놀림이 약이 되었던지 나는 서서히 대한민국 육군 이등병으로서의 면모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여느 때처럼 오후 내내 교육훈련을 받느라 주둔지  앞산에서 열심히 구르고 있었다. 일과시간이 끝나고 중대로 돌아온 우리는 저녁시간까지 내무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내무반으로 들어온 어두운 표정의 인사계원이 하는 말.
“나 참. 오늘 한 따가리 하겠는데? 니들 없을 때 중대가 한바탕 뒤집어졌어.”
우리가 교육훈련 나간 사이에 연대 인사과장이 중대에 와서 내무반 위해물품 검열을 했다는 것이다. 인접 부대에서 발생한 자살 사건의 여파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우리 중대장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다. 우리 중대장은 정말 완벽한 야전부대 지휘관이다. 특전사 출신인 그는 엄정화보다 두 살 어리지만 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강인한 인상에다 불같은 성격과 뛰어난 전술능력을 겸비한 천상 군인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아무튼 연대 인사과장은 우리 중대장이랑 사이가 안 좋았다.

이런 사람이 하이에나처럼 우리 중대를 들쑤시다가 결국 한 건을 올린 것이다. 2소대 내무반에서 방치된 태권도 도복끈발견한 것이다. 인사과장은 낼름 대대장에게 보고하고 유유히 연대로 올라가 버렸다. 그 시각 우리 중대장은 오후 상황보고를 하기위해 지휘통제실에 내려가 있었다.


“아 그럼 지금 태권도 시즌인데, 당연한 거 아냐? 중대장님 그냥 넘어가시겠지?”
우리는 내심 걱정하면서도 별 일 없을 거라 생각하며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식사를 마치고 중대로 올라오니 중대장이 분대장 전원을 호출했다. 아, 염려하던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중대 행정반 앞에 서있는 중대장과 그 앞에 열중쉬어자세로 서있는 16인의 분대장들. 그림은 참 멋있다. 분대장들의 복창소리가 연이어 들리나 했더니 그 소리가 내무반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그들이 뛰어들어온다. 분대장들은 내무반에 들어서자마자 외쳤다.
“야! 지금 당장 내무반에 있는 거 하나도 빠짐없이 중대사열대 앞으로 다 빼! 빨리빨리 서둘러. 그리고 중대창고도 다 까라신다.”
두둥!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인가. 내무반에 있는 것들 다 빼는 거야 뭐  할 만하다. 어차피 훈련 때마다 출동하면서 내무반을 텅텅 비우니깐 말이다. 거기에다 TV, 매트리스, 벽에 걸린 액자들, 책장만 추가로 빼는 거니까 귀찮은 정도지 힘들지는 않다. 근데 중대창고를 다 까라고? 중대창고를?
자 여기서 중대창고에 대해서 잠깐 알아 보자. 중대창고의 구성은 부대마다 다르겠지만 일단 치장물자 창고가 있다. 그 곳에는 휴가자 군장도 있고 화생방 탐지기, 방독면, 치장물자 등이 있다. 아니, 뭔가가 겁나게 많다. 훈련물자 창고에는 각종 훈련물품과 교보재가 있다. 그리고 자재창고. 여기가 하이라이트다. 행보관(행정보급관. 주로 군경력 20년 전후의 노련한 부사관들이 담당한다.)들은 자재창고에 목재와 시멘트, 작업도구들을 보관해둔다. 이 창고에 쌓인 물량이 행보관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척도이다. 이 창고들 외에 노래방과 탁구장이 중대창고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대창고란 말 그대로 온갖 물품으로 가득차 있는 창고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6.25 이후 유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중대를 거쳐간 빛나는 선배들이 그 창고에 물건을 짱박기만 했지 대대적으로 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곳을 지금 다 까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등병이었던 나는 사안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창고에 얼마나 많은 물품들이 비축되어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고참들의 표정은 유격 복귀행군 때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왜 하필 내 임기 중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나 퇴임하고 해도 되잖아! 왜 지금이냐고, 아아아!”
말년 보급계원이 울면서 지나간다.

우리는 소대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연병장으로 날랐다. 활동화, 슬리퍼, 책장까지 통째로 들어냈다. 내무반 안에는 덩그라니 침상과 관물대만 남았다. 그리고 우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운명의 중대창고로 돌렸다. 타 소대원들도 그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간부들의 지휘 아래 우리는 창고 안에 있던 물품들을 줄줄이 연병장으로 옮겼다. 고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일그러져 있었고, 나는 엉뚱한 불똥이 내게 튈까봐 노심초사하며 총알처럼 뛰어다녔다.
“이상병님, 제가 들겠습니다! 주십시오!”
“야 임마, 왜 내 걸 달라고 해? 저기 미치도록 많이 있잖아!”
흑... 평소 착하디 착한 이상병마저 히스테리를 부린다. 저녁 먹고 시작된 작업은 9시가 넘어가도록 계속되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중대 아저씨들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왠만하면 남의 불행을 나의 구경거리로 여겨 즐거워할 만도 한데 이건 그런 수준을 뛰어넘었나 보다. 우리를 보면서 즐거워하다가는 생명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분위기를 감지했을 수도 있겠다.
목재 하나를 연병장에 옮기고 다시 창고로 돌아가는데 소대장과 박병장이 커피자판기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각해보여 못 본 척하고 잽싸게 지나가는데 얼핏, 박병장이 울고 있는 게 아닌가? 평소에 박병장은 터프하고 카리스마 있는 무서운 고참이었다. 그런 그가 울고 있다니! 소대장이 겁나 갈궜나? 나중에 다른 고참에게서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야, 그때 박병장 왜 울었는지 알아? 안 그래도 힘든 부대 와서 개고생하는데, 말도 안 되는 걸로 후임들 X뺑이 치는 거 보니깐 억울하고 원통해서 울었대. 흑흑, 박병장님이 눈물을 보일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
태권도 도복끈 하나 때문에 중대원 100명이 야밤에 그렇게 뻘짓을 하고 있었다. 아, 내가 검은색이면 말도 안 해! 흰색이었다고, 젠장! 어느덧 취침시간도 훌쩍 지나고 11시가 다 되어갔다. 옆에 있던 후임 서이병이 내게 말한다.
“가츠 이병님. 저 오늘 불침번 초번 근무였는데, 으흐흐, 제꼈습니다. 앗싸 나이스!”
이등병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던 최일병의 레이다망에 눈치 없는 서이병의 대사가 딱 걸렸다. 최일병은 조용히 서이병을 끌고 창고 뒤로 간다. 나도 같은 이등병이지만 참 어이가 없다. 대한민국 이등병의 수치다. 개념 없는 녀석!

크지 않은 창고가 토해 놓은 것들은 어느 덧 연병장의 우리 중대 영역을 벗어나 6중대 앞까지 쌓이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나오다니, 대단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노래방 한쪽 벽면에는 엄청나게 큰 전신거울이 있었는데 그걸 빼내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비밀 공간이 나온다. 그곳에는 대대에 정식으로 보고되지 않은 각종 보급품들이 짱박혀 있었다. 대대에서는 그 공간의 존재 자체도 몰랐다. 만약 그곳의 물품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면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차마 거기까지는 까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다른 작업 때문에 들어가봤더니 그곳에는 정말 없는 게 없었다. 사람 시체 빼고 다 있었다. 아니, 열심히 뒤져보면 뼛조각 정도는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자정이 다가올 무렵 모든 작업이 끝났다. 연병장에 쌓인 물건들을 보니 허탈했다. 다음날 다시 창고로 집어넣을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도 했다. 매트리스와 모포, 침낭만 챙겨서 내무반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렇게 녹초가 된 몸으로 씻지도 못하고 잠을 자려니 내 신세가 참으로 처량했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까지도 자지 않고 노가리들 까고 있었을 텐데, 병장들마저 아무 말 없이 자는 것 같았다. 아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역시, 군대에서는 까라면 까야 한다! 그게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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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도 국방부 소속의 태양은 가차없이 떠올랐다. 연병장에 수북이 쌓인 물품들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이제 이것들을 정리해야 한다. 중대원들은 보급계원의 지시에 따라 물품을 차곡차곡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고참들의 눈치를 보며 누구보다도 빨리 움직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막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프로복서 출신의 송이병을 비롯 윤이병까지 소대에 후임이 네 명이나 있었다.
각종 장비를 창고에 넣고 나오는데, 멀리서 최일병이 엄청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들고 낑낑거리며 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뛰어가서 해맑게 말했다.
"최일병님 주십시오! 제가 넣고 나오겠습니다!"
"오호, 역시 가츠가 센스가 있어! 군생활을 할 줄 알어!"
나는 최일병이 들고가던 상자을 냉큼 받았다.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상자. 몸에 힘을 바짝 주고 그 상자를 들었는데, 웬걸, 솜털처럼 가볍다. 최일병, 그는 진정한 배우였다!
창고를 들락날락하기 수십 번, 그래도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급병은 상자나 포대에 들어있는 모든 물품을 다 꺼내서 품목별로 정리하고 수량파악을 하고 있었다. 1950년대 제조된 미군 수통부터 최신형 방독면까지 정말 군대 역사박물관이 따로 없었다. 한 순간 나의 시야에 포착된 윤이병, 연병장에 앉아서 폐(기)급 전투복을 사이즈별로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내가 가장 총애하는 우리 분대 직속 후임이었다.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도 녀석의 가공할 활약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창고 까는 날 운좋게도 근무를 나가는 바람에 지옥 같은 작업을 제꼈다. 뒤끝 있는 나는 조용히 윤이병 곁으로 다가갔다.
"야 깐돌이! 널널하지?"
"이이벼어엉 윤상혁! 아닙니다아!"
"이 색히! 지난 밤, 고참들 개고생했는데 혼자 근무 나가서 놀다오고 말이야!"
"........."
나는 귀여운 윤이병을 붙잡고 오순도순 작업을 계속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작업은 점심을 먹고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미 온몸은 땀과 먼지로 끈적끈적했고 먼지를 너무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띵했다. 목은 송충이가 기어가듯 따가웠다. 계속 하다가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고참들도 묵묵히 하고 있는데 감히 이등병이 농땡이를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쉬지 않고 짐을 옮기고 있었다.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겨서 무거워보이면서 가벼운 짐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짐을 보니 옷가지등으로 가득했다. 딱 봐도 부피만 크고 가벼워보였다. 냉큼 뛰어가서 집으려고 하는데 어느새 바람과 같이 나타난 윤이병! 그 녀석은 냉큼 내가 찜한 짐을 한아름 안아서 들었다. 순간,
아악!
윤이병은 비명을 지르더니 짐을 떨어뜨렸다. 나는 놀라서 윤이병의 상태를 확인했다. 윤이병의 손등에 커다란 주사기가 꽂혀있었다. 윤이병은 고통을 참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사기를 빼내고는 바닥에 버렸다. 도대체 이 녀석 무슨 주사를 맞은 걸까? 나는 땅에 떨어진 주사기를 확인했다.
"이.. 이것은 아트로핀!"


우리는 적들의 화생방 공격에 대비하여 방독면과 보호의를 가지고 있다. 미처 시간 내에 방독면을 착용하지 못했을 경우 적의 신경가스 공격에 노출된다. 그에 대비한 치료제가 해독제 키트다. 이 키트에는 해독제인 아트로핀 주사와 옥심 주사가 들어 있다. 적의 신경가스 공격에 노출 시, 먼저 신속하게 아트로핀 주사기를 엉덩이나 허벅지 등 살이 많은 부위에 힘껏 내리꽂는다. 충격에 의해 주사바늘이 튀어나와 약물을 투여한다. 그러나 아트로핀은 치료제가 아니고 증상 억제제이다. 쉽게 설명하면 몰핀과 비슷한 역할이라고 하면 되겠다. 고통을 완하시켜주기는 하는데 맞게 되면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리고는 옥심 주사를 같은 방식으로 투여한다. 투여된 옥심 물질은 신체 내의 신경가스를 해독하는 역할을 한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영화 <더 록>을 보면 관련 장면이 나온다. 악당들이 신경가스가 담긴 미사일을 발사할려고 하는 찰나, 니콜 형이 정의의 사도처럼 나타나서 신경가스 구슬을 해체한다. 그리고 악당과 격투를 하던 중 상대편의 입 속에 구슬 한 알을 집어 넣는다. 신경가스에 노출된 니콜형은 잽싸게 아트로핀을 꺼내서 자신의 심장에 때려박는다. 그렇지만 영화는 영화로만 끝나야 된다. 아트로핀은 혈관 주사가 아니고 근육 주사이기 때문에 심장에 때려박는 짓은 자살행위이다. 꼭 살이 많은 엉덩이나 허벅지를 애용해야 한다.
 화생방 시간에 배웠을 때는 아트로핀을 총 3회까지 투여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이상 투여할 때는 꼭 군의관의 처방이 있어야만 한다고 했다. 아트로핀의 중독성으로 인해 위험하다는 속설도 있고, 과다하게 투여하면 사망까지 이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유효기간은 대개 5년에서 10년 안팎이었다. 그러나 내 손에 들려있는 아트로핀 주사기에는 1988년에 제조되었다는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손등에 주사를 제대로 투여한 윤이병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다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야, 깐돌아! 괜찮아?"
"괜찮습니다... 최일병님!"
"야! 나 가츠야, 임마!"
그 녀석의 얼굴을 보니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다. 눈은 풀려서 헤롱헤롱거리고 있었고 손등은 벌겋게 퉁퉁 부어올랐다. 나는 재빨리 윤이병을 박병장에게 데려갔고 박병장은 그의 손을 꼭 잡고 의무중대로 뛰어갔다. 나는 윤이병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그의 쾌유를 두 손 모아 기원했다.

‘깐돌아. 꼭 무사히 돌아와야 된다! 너 오늘 야간근무 있잖아? 나 비번이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