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도착하는 사연을 읽다보면, 서로를 잘 알기에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곰신들이 많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에도 같은 말을 하는 동기가 있었다. 그 동기는 여자친구와의 이별사유로 '여자친구의 한숨'을 꼽았다.
둘 사이에 의견충돌이 일어나거나 갈등이 생길 때 마다 그 동기의 여자친구는 전화기에 대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 동기는 여자친구의 한숨을 듣고 있노라면 안 그래도 갑갑한 상황이 더 자신을 조여 오는 것 같고, 왜 연애를 하며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연애가 후회스러웠다고 한다.
그런 동기 녀석에게 "지금 한 얘기를 여자친구한테도 한 적 있어? 한숨 쉴 때마다 네가 더 힘들다는 얘기?"라고 묻자, 녀석은 "해봤지. 한숨 좀 쉬지 말라고 계속 얘기했는데 그대로야. 절대 안 바뀔거야."라는 이야기를 했다.
만약 그 동기가 "한숨 좀 쉬지 말라고. 짜증나니까."라고 얘기하는 대신, 그 한숨을 들을 때 마다 자신도 힘이 빠지고 괴로움이 오래 간다는 얘기를 했다고 해도 둘은 헤어졌을까? 뭐,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니 오답 정답을 구분해 이야기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가진 채 "바뀌지 않아. 가능성이 없어."라고 말하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자, 오늘은 이처럼 "남자친구의 이런 행동,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라고 얘기하는 곰신들의 사연을 모아서 살펴보자.
남자친구가 통화를 할 때마다, "어디야?"라든가 "뭐해?"라며 자신을 의심하듯 묻는 것이 너무 싫다는 곰신이 있었다. 자신이 정말 다른 짓(응?)을 하고 있다면 억울하지 않을텐데, 남자친구 하나만 바라보며 기다리는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너무 싫다는 사연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남자친구가 자신의 불안을 의심으로 바꿔 곰신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사연에서는 남자친구가 '불안'을 '의심'으로 바꿀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B. 대학 새내기의 특성상 곰신이 학과 사람들과 술자리를 자주 갖는다.
C. 곰신이 친구들과 어울려 클럽에 갔다가 남자친구에게 걸린 적이 있다.
이런 '전례'들이 있다고 해서 의심을 들이대는 것을 합리화 시킬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전 정말 남자친구 하나만 보고, 기다리고 있거든요."라는 말로 모두 다 이해하기도 힘든 노릇이다. 사연을 보낸 곰신은 "제 진심은 이러이러한데 왜 이 진심을 믿어주지 못하는 거죠?"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곰신이 유학을 가 있는 상태에서 남자친구가 전화를 못 받을 때가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술자리를 자주 갖는다. 그리고 친구들과 클럽에 갔다가 걸린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친구가 "나 못 믿어? 난 너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고!"라는 얘기를 하면, 쉽게 수긍할 수 있겠는가?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는 듯 보인다. 곰신은 이미 남자친구에게 "오빠가 이럴 때 마다 정말 지친다."라는 얘길 했고, 남자친구는 그 말을 "이별의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느낌이야."라는 말로 받았다. 남자친구의 불안은 곰신의 전례들로 인해 의심으로 바뀌었고, 곰신은 그 의심을 집착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곤 결국 그 문제가 둘의 사랑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무작정 남자친구에게 "의심 좀 하지마."라고 이야기 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인 '남자친구의 불안'을 먼저 해결하길 권한다. 남자친구의 불안에 대해서는 연락의 횟수를 늘리는 것 만으로도 해결이 될 것이다. 군대에 있어 연락이 불편한다면 편지나 메일, 미니홈피등을 이용해 곰신이 남자친구를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면 될 것이고 말이다. 싱거운 도가니탕에 "왜 이렇게 싱거워!"라는 이야기를 해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럴 땐 싱겁다며 짜증만 낼 것이 아니라, 소금을 채워 넣자.
어머니, 또는 가족들과 함께 면회 오라고 하는 남자친구에 대한 사연이 많았다. 남자친구의 입장에서는 가족들도 보고 여자친구도 볼 수 있으니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곰신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긴장되고 어느 정도의 불편함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 부분에선, 여자친구가 가질 수 있는 긴장감과 불편함까지 돌아보지 못한 남자친구의 문제도 있지만, 여자친구의 이해와 배려가 '오해'를 불러오는 문제도 있다. 입대할 때 여자친구가 부모님과 함께 왔던 것을 보곤, 남자친구가 '아, 우리 곰신이는 부모님과 함께 있을 것을 불편해 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곰신의 입장에선 입대하는 날이나 첫 면회 등은 필연적으로 남자친구의 부모님과 함께 갈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이후의 면회는 둘이 만나 속 깊은 얘기도 하고 싶고 애정표현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바로 이 상황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냐에 따라 이후의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오빤 왜 자꾸 오빠 부모님이랑 같이 오래? 난 안 불편한 줄 알아? 오빤 내가 우리 아빠랑 같이 어디로 오라고 하면 좋겠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에 담긴 가시가 상대를 찌르고 상대는 방어적으로 "그럼 그렇다고 얘길하면 되잖아. 왜 화를 내? 됐어. 같이 오지 마."라는 얘기를 하게 된다. 이렇게 '누가 누가 잘했나.'를 가리는 것은 갈등만 깊게 할 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자친구가 곰신을 괴롭히거나 고통스럽게 하려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남자친구는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다보니 미처 당신의 부담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럴 땐 가르쳐주자. 가르쳐 줄 땐, 상대의 잘못부터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그 일로 인해 곰신이 겪는 어려움을 먼저 이야기 하는 것이 좋다. "오빠는 왜 그래?"라며 답을 내놓기 힘든 물음 말고, "나 사실 부모님이랑 같이 가는 거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이번에는 혼자 가서 오빠랑 얘기도 많이 나누고 싶고 그래."라며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신에 대한 어려움을 이야기 하면, 남자친구도 당신의 솔직한 심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고 무작정 혼자 이해와 배려를 한다고 늘 '오케이'만 하면, 상대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대화를 통해 함께 해답을 구하자. 연인이 맞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부모님이랑 오는 게 뭐가 불편해?"라고 당신을 다그칠 남자친구는 없을테니 말이다.
통제받는 것이 많은 군대에서의 생활이 사회에 있을 때 보다 어렵고 힘들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곰신들이 죄책감을 갖거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챙겨주고 싶고, 더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계속 되는 선물과 여러 희생들로 군화 '만' 힘든 것 같은 상황을 만들지 말란 얘기다.
소포와 돈 때문에 힘들어 하는 곰신들의 사연이 있었다. 남자친구가 군대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임들의 몫까지 선물을 사서 소포를 보내고, 남자친구가 휴가나 외박을 나오면 유흥비까지 자신의 돈으로 다 마련하며, 늘 수신자부담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엄청난 전화세를 부담하고 있는 이야기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하다보면 상대가 가졌던 '감사함'은 점점 무뎌져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힘든 상황이 되어 이 이야기를 남자친구에 꺼냈다가 마음이 변했다고 오해를 받거나, 남자친구가 서운한 마음을 갖는 경우가 있다. 그런 까닭에 이제 막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낸 곰신들에게는 처음부터 '전력질주'를 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군대는 며칠, 몇 주 있다가 오는 캠프가 아니라 몇 번의 계절이 바뀌어야 하는 장거리 달리기다. 처음부터 전력질주를 하게 되면 얼마 안 가 지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상대는 "전에는 잘 달렸잖아. 갑자기 왜 그래?"라는 말을 하기 쉽다.
군화 '만' 힘들다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가지거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진 말란 얘기다. 그 마음으로 무리를 해 가면서까지 한 일들은 결국 곰신 자신을 괴롭히게 될 것이다. '단기전략'이 아닌, '장기전략'이 필요하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제 매뉴얼의 서두에서 밝힌 "서로를 잘 알기에,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자신이 정의한 상대,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대의 이미지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람의 성격이나 마음은 유동적이지 않은가. 당신이 어제 가졌던 생각을 오늘 고칠 수 있는 것처럼 상대도 그럴 수 있단 얘기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상대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길 부탁하자. 상대의 진심은 그 누가 아닌 상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곰신 자신의 감정을 '이해'나 '배려'등으로 감추지만 말고 그때 그때 군화에게 알려주도록 하자. 컴퓨터에 설치된 백신프로그램이 '에이, 그냥 넘어가지 뭐.'라며 바이러스를 잡지 않는다면, 결국 그 컴퓨터를 쓰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게 되는 것 아닌가.
군대에서 유명한 말 중에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라는 구호가 있다. 정비병들이 차량을 관리할 때 쓰는 말인데, 당신의 사랑에도 이 구호가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며 먼지가 앉고 녹이 슬고 풀어지는 사랑에 대해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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