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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하軍/생생! 병영탐구

달라진 2010 예비군 훈련장, 그 현장에 가다!



"환영합니다 선배님!"

동원3년차인 나는 얼마전 동미참 훈련을 다녀왔다. 훈련장소는 안양에 위치한 예비군훈련의 메카인 박달교장이다. 이 곳은 영등포구, 금천구, 구로구 예비군 훈련을 전담하고 있다. 한달전, 영등포구로 이사온 나에게는 새롭게 접하는 예비군훈련장이다.




"훈련에 지친 자! 편안한 셔틀버스를 이용하라!"

첫날은 모르고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여 훈련장에 도착하였는데, 둘째날부터는 집 앞까지 운영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며 편안하게 훈련장을 오갈 수 있었다. 또한 군복을 입고 민간인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복장 제대로 갖춥니다!"

언제나 예비군의 복장은 자유롭기 그지없다. 상의단추는 물론이고 전투화끈마저도 풀고 걸어주는 센스, 진정 예비군의 소울이다. 그러나 이제 잠시나마 참군인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다. 인도인접을 하기 위해 단정한 복장은 필수이다.




"다시 무적의 군인으로 만들어주마!"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만 믿도록!"

"..........."




"본인 맞습니까? 대리로 오신 거 아닙니까?"

"저 맞습니다!"

"아무리 봐도 얼굴이 다른데!"

"포토샵을 좀 무리해서 그래요!"

엄격한 인도인접을 거치고 부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훈련기간 동안에는 외부와의 출입이 통제되고 휴대폰 사용 또한 제한된다. 물론 늦게 오는 인원에 대해서는 훈련시간이 추가된다. 예비군 또한 엄연히 군인이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선배님 총 가져가셔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전투장구류까지 모두 지급받게 되면 훈련준비가 완료된다. 예비군 훈련에는 동원훈련과 동미참훈련 등이 있다. 동원훈련은 연초 병무청 책임하에 1~4년차 예비군에게 동원지정을 하게된다. 동원지정자는 해당 부대로 2박 3일동안 입영하여 28시간동안 훈련을 받게되고. 숙식은 모두 부대 내에서 해야 한다.

동미참훈련의 경우에는 병무청에서 동원지정이 되지 않았거나, 동원지정자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훈련을 연기하였을 경우 인근 훈련장으로 출퇴근하며 훈련을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미참훈련 24시간에 전반기, 후반기 향방작계훈련 각각 6시간, 총 36시간동안 받아야된다. 어찌 보면 짧고 굵게 끝나는 동원훈련이 좋을 거 같기도 하다.

 



"이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현역으로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도 다시 예비군훈련을 받는 것에 대해 불만이 적지 않다. 그러나 대한민국 남자로서 자신이 살아가는 고장을 지키는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하다. 지금 이시간에도 북한은 우리나라에 대한 도발을 멈추지 않고 있다.

북한은 1968년 휴전선 근방에서 교란행위 뿐만 아니라 무장공비를 남파하여 청와대 공격을 기도하고 잇따라 해상에서도 미국 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 호를 비롯한 한국 어선의 납치행위 등을 계속하였다. 1968년 한 해만도 무려 300여건, 1천 여 명에 달하는 무장간첩을 남파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북한의 대남공작 전술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이와 같은 긴박한 상황 하에서 정부는 자위를 위한 중대 결의를 하고 유엔에 대해 자주국방 요구를 하게 되었다. 이 요구는 특히 미국의 대북한 유화정책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향토예비군은 최초 1968년 4월 1일에 창설되었다. 당시 북한은 전쟁에 대비하여 1962년 4대 군사노선을 발표하였고, 1966년 8월에는 이른바 자주노선을 선언하여 1970년대 ‘남조선 적화통일’이라는 목표를 두고 전쟁도발행위를 격화시키고 있었다.






"충성! 입소를 명받았습니다!"

"늘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그대들이 자랑스럽다!"

향토예비군은 후방지역 작전을 통해 전국토의 방어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주민들의 호응으로 민관군 협조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후 향토예비군은 단계적으로 정비 강화되어 4백50만 명에 달하는 막강한 제2의 국군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향토예비군의 조직은 당시 북한군 2백10만여 명의 병력을 상회하는 우위효과를 주었으며 실질적으로 후방방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초창기 향토예비군의 장비는 1968년 5월에 개최된 한·미 국방장관회의에서 결정된 1억 달러 추가 군사원조 중에서 M-2 카빈 소총을 비롯하여 탄약 및 부속품을 공급하기로 결정되어 이를 보급받아 무장하였다.




"예비역이라고 우습게 보지마라!"

이와 같이 창설된 향토예비군은 이듬해 7월 29일에 무안 허사도에 침투한 무장공비 2명을 사살한 전과를 시작으로 군경과 함께 같은 해 11월 2일에 울진·삼척지역에 출현한 무장공비 107명 사살, 7명 생포, 그리고 주문진 무장공비 침투 시 8명을 사살하는 등 수많은 크고 작은 작전과 최근 재해복구 작업에서도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시간,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도 불철주야 조국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정된 군인의 수로는 대한민국 전 영토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없다. 그렇기에 마을마다 예비군 부대를 운용하여 불시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보다 깔끔해진 시설!"

예비군훈련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열악한 훈련환경과 식사를 꼽을 수 있으며, 바쁜 시간을 반납하고 훈련 받으러 온 예비군들에게 결코 환영받을 수 없었다. 예비군이 창설된지 40여년이 지나도록 상비군에 우선 순위에 처져 열악한 환경 속에서 훈련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번에 훈련 받으러 간 박달교장은 시설이 많이 최신화되었다. 화장실은 물론이고 예비군들이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까지 운영되고 있었다.





"오호! 설렁탕이다!"

아쉽게도 메뉴의 선택권은 없었지만 4일동안 매일 다른 메뉴로 예비군들에게 만족스런 식사가 제공되었다. 부속건물에는 우동도 판매하고 있었다. 박달교장에서는 예비군의 불편사항 중 하나인 식사 문제는 별 문제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를 하는 예비군들을 보니 다행히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나 역시 4일동안 훈련을 받으며 든든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군부대의 매력인 PX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사재기 해가야지!"

그렇게 오전 일과가 끝나고 오후부터는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다음편에서는 보다 달라진 예비군훈련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드리겠다.




coming soon

posted by 악랄가츠(http://realo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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