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언덕서 지뢰 펑… ‘칸 카르데시’에 내 발목을 묻었소”
《‘퍽∼.’ 1952년 5월 15일 오후 5시. 경기 파주시 문산의 일명 스탈린언덕에서 전투를 마치고 귀대하던 터키 2여단 1대대 2중대 1소대장 압둘카디르 타브샨 중위(당시 27세)는 순간 주저앉았다. 지뢰가 터지면서 오른쪽 복사뼈 아래 발목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피범벅이 된 발목에서는 격한 통증이 몰려왔다. 소대원들이 몰려와 허리띠를 풀어 발목을 묶었다. “소대장이 다쳤다”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대원들은 의무병에게 위치를 알리기 위해 하늘에 총을 여러 발 쐈다. 의무병이 들것을 가져올 때까지 40분이 더 걸렸다.》
명예를 지킨 아버지
“공산주의 싫어 참전 지원… 지금 전쟁나도 또 갈 것”
양국우호 앞장선 아들
“상이군인은 존경의 대상… 자긍심 갖고 교류 사업”
○ 6시간 동안 이어진 혈투
9일 앙카라에서 만난 타브샨 씨(85)는 58년 전 그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단장이 전날 오후 5시 2중대에 스탈린언덕을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지. 스탈린언덕은 낮에 우리가 언덕을 점령하고 돌아서면 밤에 중공군이 차지하곤 했어. 10여 일째 이런 상태를 되풀이하며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소.”
2중대 대원 90여 명은 이날 오전 8시부터 스탈린언덕으로 향했다. 오전 10시 멀리서 중공군의 총소리가 들렸다. 오후 4시까지 6시간이 넘는 혈투가 이어졌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터키군은 중공군의 총성이 멈추면 다시 전진했다. 이날 터키군은 중공군 20여 명을 사살하고 4명을 포로로 잡았다. 터키군은 4명이 숨지고 3명이 부상당했다.
“발목이 잘려 나갈 때 ‘죽었다’고 생각했지. 순간 갓난아기였던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어. 이제 못 볼 것 같았지. 침착하게 소리를 지르지 않고 의무병을 찾았어. 전쟁터에서는 여러 상황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다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소.”
○ 생후 보름 지난 아들을 뒤로하고
그는 부인이 첫아들을 낳은 지 15일 만에 한국으로 떠났다. 타브샨 씨는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이게 확산되는 것을 막고 싶어 한국전쟁 참전을 자원했다”며 “아내는 반대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터키에서 부산까지 배로 27일이 걸려 1951년 11월 20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타브샨 씨는 춘천, 원주, 수원, 파주 등을 돌며 7개월간 전장을 누볐다. 그에게는 주로 정찰 임무가 맡겨졌다.
터키로 귀국해 해군병원에 입원했던 타브샨 씨는 1952년 11월 전역했다. “군인으로 자긍심이 컸는데 솔직히 안타까웠지. 나는 군사 중고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당시에는 군인의 삶만 생각했었으니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걱정만 했어.”
6·25전쟁에 참전했던 동료 장교들은 대부분 장군으로 진급했고 그의 육사 동기 중에는 총사령관(합참의장)도 나왔다. 군복을 벗은 타브샨 씨는 1952년 12월 이스탄불에서 동쪽으로 1700km 떨어진 고향에 돌아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환영한다’고 한마디만 한 뒤 나를 껴안고 울기만 했지. 젖먹이 아들은 내가 아빠인지 몰라보더군. 솔직히 죽지 않고 고향집에 도착할 수 있어 기쁘기만 했소.” 타브샨 씨는 이후 군수협력업체 직원을 거쳐 30년간 터키 산림청에서 근무했다.
○ 아들과 함께 한-터키 우호 다져
그의 큰아들 우스트네르 타브샨 씨(59)는 “터키인들은 상이군인을 놀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아들까지 존경한다.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큰아들은 지난해 12월 사재를 들여 한국-터키 민간협력단체인 ‘앙카라서울경제협회’를 세웠다. 타브샨 씨는 명예회장을 맡았다.
큰아들은 “터키의 젊은이들이 ‘한국은 혈맹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하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단체를 만들었다. 경제, 문화 교류뿐만 아니라 양국 간에 우호협력을 증진시키는 일을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학생 교류 등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브샨 씨도 “젊은층에 두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을 널리 알려야 하는데, 이런 것이 부족해 아쉽다”며 “두 나라가 형제 국가임을 드러낼 수 있는 문화 산업 경제 등 다양한 교류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타브샨 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6·25전쟁 참전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을 사랑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한국에 전쟁이 나서 다시 불러주면 이 다리를 끌고 갈 거요. 내가 거기서 피를 흘렸다는 것은 한국이 나의 다른 조국이요, 민족임을 뜻하는 거지.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터키를 응원했을 때 난 너무나도 기뻤어.”
그의 성(姓) 타브샨은 터키어로 토끼라는 뜻이다. 타브샨 씨는 한국에서 ‘산토끼’ 노래를 배웠고 아들과 손자들에게 한국어로 이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
■ “아버지세대의 용맹 젊은층에게 알려야”
6·25 연구하는 참전 2세대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절대 한국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죠. 역사 속에 아버지를 남기고 싶어 책을 쓰고 있습니다.”
앙카라 우푹대의 알리 데니즐리 역사학과 교수(57)는 6·25전쟁 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터키의 대표적인 6·25전쟁 연구 학자다. 육군 대령 출신인 그는 2006년 연구를 위해 장군 진급을 포기했다. 그의 장인은 1953년 6·25전쟁에 참전했고, 아버지는 1954년 유엔군 소속 터키군으로 한국에서 근무했다.
데니즐리 교수는 올해 사비를 털어 ‘한국전쟁 군우리 영웅들’ 등 터키의 6·25 참전 관련 책 3권을 펴냈다. 앞으로 20여 권을 더 내놓을 예정이다. 그는 20여 년 전부터 6·25전쟁을 연구했고 1992년 앙카라의 하제테페대에서 6·25전쟁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요즘 터키 젊은이들은 터키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른다”며 “이런 책을 쓰는 게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데 일조한 터키군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스탄불 아나돌루의료원의 네크메틴 오젤릭 사무장(52)은 1951년 6·25전쟁에서 숨진 5촌 아저씨를 기리기 위해 1985년부터 헌책방 등을 돌며 6·25전쟁 관련 사진과 자료, 훈장 등을 모아 박물관에 기증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03년부터는 터키 육군사관학교와 중고교, 각종 단체에서 터키의 6·25전쟁 참전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그는 “터키 참전용사들이 얼마나 용감했는지를 터키인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 터키군 희생 덕에 미군 주력부대 무사했다
중공군 인해전술 맞서 평남 군우리서 게릴라전
후퇴 길목 지켜냈지만 퇴로 차단당해 희생 커
터키에서 한국은 ‘피로 맺어진 형제의 나라’라는 뜻의 ‘칸 카르데시(Kan Kardesi)’로 불린다. 터키어로 칸은 피를, 카르데시는 형제를 의미한다. 박학량 터키 주재 국방무관(육군 대령)은 “80세 이상의 참전 노병들은 스스로를 ‘코렐리(한국인)’라고 부를 정도로 한국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터키는 1950년 10월 19일부터 3차례에 걸쳐 3개 여단을 한국에 보냈다. 총인원 1만4936명이 군우리(평남 덕천), 금양장리(경기 용인), 네바다(경기 연천)전투 등에 투입돼 741명이 숨지고 2068명이 부상당했다. 163명이 실종됐고 244명은 포로로 잡혔다. 터키군은 1974년 10월까지 마지막 1개 분대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터키군은 특히 군우리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군우리전투는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일까지 평양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군우리 일대에서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을 막으며 미8군 주력부대의 철수를 지원한 전투다. 터키여단은 중공군에 퇴로를 차단당해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런 희생 덕분에 군우리 서쪽에 있던 유엔군이 후방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8일 앙카라의 참전협회에서 만난 군우리전투 참전 노병들은 당시를 회고하며 눈물을 지었다.
“85만여 명의 중공군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는데, 백기를 들고 항복을 가장하며 몰려 내려왔지. 우리는 퇴로의 병목에 해당되는 부분을 맡아 4박 5일 동안 버텼어. 터키군이 없었다면 추가로 사상자 25만 명 이상이 났을 거야.”(무자페 세부케베 씨·93·당시 수색중대장)
“내가 본 것만 해도 트럭 27대에 부상병이 가득 실려 왔지. 나도 다친 다리를 스스로 치료해야 했어. 나는 결국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혔지. 풀려날 때까지 하루 한 주먹의 옥수수로 끼니를 때워야 했어.”(벨리 아타소이 씨·80·의무병)
“너무 배가 고파 철수하기조차 힘들었어. 우리는 군우리 인근에 머물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주변에 모두 중공군이 가득했어. 게릴라전투를 펼칠 수밖에 없었지.”(케말 알칸 씨·84·소대장)
또 1953년 5월 베가스(강원 철원 인근)전투에 참여했던 야사르 에켄 씨(80)는 “포격이 시작돼 그저 한 번 붙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야말로 비가 내리는 듯한 폭격을 받았다”며 “스물여섯 시간 동안 열여섯 차례나 진지를 되찾고 빼앗기기를 반복했다”고 전했다.
글·사진 앙카라·이스탄불=이유종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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