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에 입대한 가츠는 원래 5월 첫째 주 전후에 백일휴가를 나갔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 부대는 본격적인 훈련시즌에 돌입하고 있었다. 4월초 유격훈련을 시작으로 줄줄이 군지휘검열, 중대전술 훈련, 진지공사를 치른데다 5월 16일에는 대대ATT를 앞두고 있었다. 중대장은 나를 비롯한 동기들에게 대대ATT를 마치면 기필코 백일휴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어떻게든 백일휴가는 나갈 테니, 기왕이면 늦게 가는 게 좋다고 고참들은 말해주었다. 맞는 말이다. 모든 것이 힘든 이등병에게 유일한 희망은 백일휴가뿐이다. 백일휴가를 갔다온 이등병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 백일휴가를 늦게 갈수록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백일휴가를 일주일 앞두고, 대대ATT가 시작되었다. 대대ATT란 쉽게 설명해서 자신이 속한 대대의 전술평가 훈련이다. 좋은 평가 결과를 내기 위해, 훈련 통제관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행군코스를 짜고, 개인시간을 통제하여 체력단련을 강요한다. 물론 여기에는 휴가 통제도 필수로 포함되어있다.
훈련 첫날, 기상과 동시에 준비태세가 걸리고 통제관들이 카메라를 들고 내무실로 들이닥쳤다. 나는 신속히 군장을 결속하고 분대장을 따라 치장 물자를 내무실로 가져와서 소대원들에게 신속히 나눠주고는 대대 소산진지로 투입되었다. 소산진지에서 이상병과 안면위장을 한 뒤 경계방향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하이에나 같은 통제관이 어리버리한 이등병 가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이에나는 군침을 흘리며 눈앞에 있는 어린 가젤영양에게 물었다.
“자네 임무가 뭔가?”
“이병 가츠! 저는 5중대 3소대 1분대 2번 소총수로서, 상황발생 시 신속히 단독군장을 착용하고 완전군장을 결속한 후, 분대장의 지시에 따라 치장 물자를 소대원들에게 분배한 다음, 대대 00소산진지로 투입합니다. 5.56mm보통탄 000발, 세열수류탄 0발. 이상입니다!”
“뭐야! 이 색히 전혀 이등병답지 않잖아! 쩝.....”
후훗~. 지난 주말 스파르타식 주입교육의 성과지롱.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고, 분대원들은 취사장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분대장은 자못 진지하게 우리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야야! 오늘은 겁나 빡세지 싶다. 대대장님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어. 완전 무개념 행군코스니깐 다들 몸 관리 잘하고 제발 퍼지지 마라. 무조건 많이 먹어. 그리고 가츠는 행군할 때 물 많이 마시지 말고, 수통에 물은 반만 채워.”
아~, 지난 유격훈련 복귀행군 때도 널널하다고 걱정하지 말라던 사람이 이 정도로 말하는 걸 보니 오늘 코스는 정말 빡세겠구나. 곧이어 우리는 대망의 2005년 대대ATT 출발행군을 시작했다. 아침 8시에 출발한 우리는 오후 7시가 다 되어서야 최초 목적지에 도달했다. 도착하자마자 숙영지를 편성하고 식사배식을 하는 순간, 소대장이 분대장들을 불러 모아 명령하달을 했다. 돌아온 우리 분대장이 말했다.
“야야, 텐트 걷어라. 짱깨(가위바위보) 졌어. 우리 분대는 부소대장님이랑 추진매복 하러 간다. 쏘리, 쏘리. 내가 짱깨 졌어요.”
군대에서 가위바위보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다. 부식짱깨, 작업짱깨, 근무짱깨 등 곳곳에서 이 스킬은 정말 중요한다. 심지어 외박, 휴가 날짜도 동기들끼리 짱깨쳐서 잡으니 말이다.
“야 그래도 산꼭대기에서 통제관 없이 우리끼리 있으니까 흡연과 취침이 보장되잖아. 우린 자유를 찾아 떠나는 거야! 더 좋은 거야! 가츠야, 담배 피고 싶지? 가서 마음껏 펴!”
다시 텐트를 접고 부소대장을 따라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갔다. 이건 진짜 강원도의 원시림인가 보다. 길이 없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하나도 없다. 무작정 올라가는데 욕이 저절로 나왔다. 나무뿌리를 잡고 기어 오르고, 돌부리 하나에 목숨을 의지한 채 절벽을 탔다. 1시간 넘게 생고생을 하고나서야 겨우 정상에
도착했다. 사실 좀 더 올라가야지 정상인데, 더 이상은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우리가 전문 산악인은 아니잖아? 목숨 걸고 나라 지키는 건 맞지만, 지금은 훈련상황이잖아? 목숨은 전쟁 나면 걸기로 하고, 정상을 50여미터 앞둔 곳에서 숙영지를 구축했다. 부소대장까지 도합 7명, A형 텐트 3동을 쳤다.
대대ATT 첫날밤을 강원도 외딴 곳의 이름모를 산 정상에서 보네게 되었다. 그러나 명색이 추진매복인데 다 자고 있으면 되겠는가? 2명씩 2시간 교대로 정상에서 매복하기로 했다. 이상병과 나는 새벽 2시에
투입되었다. 사실 담배를 안 피는 이상병은 같은 근무조로 반갑지는 않았다. 묵묵히 앞만 보고 있는데
이상병이 내게 천상의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가츠야! 한대 펴라~!”
“이병 가츠! 감사합니다. 이상병님 킹왕짱.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참이 바로 님이예요!”
그렇게 한 모금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일주일 앞둔 휴가를 생각하며 즐거워했다. 다음날 저녁 야간공격
출발할 때까지 그곳에 있어야 했다. 불현듯 스치는 걱정 하나. 저녁을 먹고 여기 올라왔는데, 내일 아침,
점심, 저녁은 어떻게 하지? 전투식량도 안 주던데, 설마 매끼마다 받으러 내려가야 하나? 그렇다, 문제는 밥이었다. 일단 무조건 나는 밥을 타러 내려가야 되는 위치였다. 전날 올라갈 때만 근 2시간 가까이 걸렸다. 비록 밥 타러 갈 때는 군장 안 메고 가겠지만, 안 봐도 개고생이다. 그렇게 아침이 밝았고, 96K 무전기로 밥 타러 내려오라는 무전이 왔다.
이상병과 심이병, 나 셋이 출발했다. 이거 어제와 길이 다르다. 어디가 어딘지 당최 감이 안 온다. 사실
2년 내내 산만 타는 소총수로서 왠만하면 정확하고 빠른 루트를 통해서 이동하는데 도가 텄지만, 이번에는 부분대장인 이상병조차도 헷갈리나 보다. 하긴 어제 길도 없는 곳을 야밤에 정상을 향해서만
올라왔으니 오히려 길을 찾는 게 신기하다. 내려가면서 보니 정말 목숨 걸고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헤매고 해매서 1시간 넘게 걸려 소대 숙영지로 도착했다. 이미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만신창이다. 이미 아침식사를 다 마치고 우리 밥을 따로 타놓은 소대원들은 우리를 보더니 입을 쩍 벌린다.
“우와, 1분대 개고생하는구나. 휴우, 우리 분대장 짱깨 이겨서 진짜 다행이다!”
다른 분대 분대장들은 개선장군처럼 기세등등하다. 그렇게 밥을 받자마자 다시 분대원들이 기다리는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하악하악, 다시 1시간 넘게 걸려서 도착한 정상. 대략 10시쯤 된 것 같다. 그렇게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정리하려는데 무심히 들리는 96K 무전기 소리.
“치직치직~ 당소, 당소. 소본 전방에 작전 중인 1분대 등장 바람.”
“당소 1분대장! 무슨일인가?”
“1분대 곧 중식추진 예정이니 중식 받을 인원 내려보내기 바람.”
이건 미친 짓이다! 결국 부소대장은 우리를 배려하여 점심을 굶기로 했고, 저녁은 철수하고 내려가서 먹기로 했다. 천만 다행이다..... 우리는 그렇게 정상에서 종일 뒹굴거렸다. 이윽고 어둠이 찾아왔다. 그런데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텐트가 물에 젖기 전에 잽싸게 해체한 뒤 철수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7시경, 다시 날아온 소대장의 무전.
“치직치직~ 2분대 잘 듣기 바람. 중대장 지시로 2분대는 전원 철수하지 말고 2명은 현 위치에서 야간공격 출발 직전까지 감시매복하기 바람.”
결국 부소대장과 이상병이 남기로 했는데, 야간공격 출발 직전에 그들이 잽싸게 내려와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군장은 우리가 들고 철수하기로 했다. 그 중 하나는 당연히 내 몫이었다. 나는 비오는 야밤에 군장까지 2개를 들쳐메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을 많이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오르막보다 내리막길이 훨씬 더 위험하다. 그것도 비오는 야밤에 길도 없는 산 속에서는 특히 그렇다. 내 군장도 무거운데 하나 더 메고 있으니 가만히 서있어도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전투화가
비에 젖은 낙엽에 미끄러졌다.
“어어어어어어! 살려주세요오오오~!!”
내 몸무게와 군장 2개에다 소총을 비롯한 단독군장의 무게로 쏜살같이 미끄러지다가, 메고 있던 소총이 나무에 걸리면서 가까스로 멈췄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독이었다. 곧이어 달려온 분대원들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일어났는데, 분대원들 모두 나를 보며 화들짝 놀라는 것이 아닌가? 엄청난 무게를 지탱한 소총의 멜빵은 내 오른쪽 어깨를 툭 하니 분리시켜 주었다. 나는 좀비처럼 오른쪽 어깨가 빠진 상태로 서있었던 것이다. 몸 상태를 인지한 나에게 고통이 엄습해왔다.
“어어어어, 분대장님! 어깨가 이상해요. 팔이 말을 듣지 않아요. 너무 아파요! 흑흑, 움직일 수가 없어요. 블랙호크 불러주세요, 엉엉엉!”
“야 가츠! 일단 여기서는 죽도 밥도 안 돼. 일단 메고 있는 군장부터 벗어 봐!”
“으아아아악! 살려주세요 분대장님. 근육이 이상해요. 뒤틀린거 같아요. 하악하악, 블랙호크는 언제 와요?”
내 군장 위에 얹어놓았던 또 다른 군장은 저 밑으로 굴려내려갔고, 심이병이 절벽 밑으로 기어가서 낑낑거리며 주워오고 있었다. 막상 군장을 벗으려니, 이걸 벗으면 오히려 더 아플 거 같았다. 오히려 무거운 군장이 탈골된 어깨를 고정시켜주면서 고통을 덜어주는 것 같았다. 분대장에게 군장을 벗으면 더 아플
거 같으니 그냥 메고 있겠다고 했다. 하나뿐인 무전기는 아직 정상에서 매복 중인 부소대장한테 있고,
우리는 소대와 교신할 방법도 없었다. 결국 그 상태로 소대 숙영지까지 내려가기로 했다. 두 팔로도 아슬아슬하게 내려오던 길을 이제 한 팔로 내려가야 했다. 상태가 너무 긴박했고 팔이 너무 아팠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니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면서 일단 무사히 내려가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한 손으로 나무를 잡거나 하면 무게중심이 쏠려서 온몸의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결국 그냥
미끄럼틀 타듯 엉덩이를 땅에 대고 미끄러지면서 내려갔다. 축축한 바닥에 튀어나온 나뭇가지나 돌부리 때문에 이제는 엉덩이까지 아프다. 그렇게 1시간을 내려가니 전방에 소대 숙영지가 보였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제 난 살았구나!”
분대장은 나를 데리고 바로 소대장에게 달려갔다. 면목이 없다는 듯 소대장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분대장. 미안했다. 사실 내가 미끄러져서 다친 건데, 우리 분대장은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표정이 어둡다. 음.. 하긴 내게 군장을 2개 안 줬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지. 소대장은 나를 살펴보며 물었다.
“야 가츠 괜찮아? 군장 내리고 상의 벗어 봐!”
이윽고 내 주위에는 소대원들이 하나 둘씩 모였고, 나는 분대장의 도움을 받으며 군장을 어깨에서 분리하고 상의를 벗었다. 내 오른쪽 어깨는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고, 어깨 관절에서 분리된 오른팔은 한참 아랫부분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야 이거, 이 상태로 야간공격 갈 수 있을까? 중대장한테 보고하면 개갈굼 먹을 텐데! 야 가츠, 갈 수 있겠냐?”
헐. 이 사람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날 데리고 야간공격을 하러 간다고?순간 내 머릿속을 때리는 아픈 진실 하나가 있었다. 전쟁영화는 개구라였어!
“이병 가츠! 갈 수 있습니다!”
일단 대답은 이렇게 했다. 하긴 소대장도 물어보고 나서 미안했던지, 96K를 손에 들고 중대장한테
보고했다.
“당소, 당소 3P장(3소대장)! 5찰리장(5중대장) 등장 바람!”
“당소 5찰리장! 무슨 일인가?”
“당소측 환자 발생! 더이상 훈련투입 불가능해 보인다고 알림!”
“어떤 새끼야! 병력관리 그따위로 할거야! 뭔데 뭐가 문제야?”
“이병 가츠라고 알리고, 작전복귀 중 미끄러져서 어깨 탈골되었다고 알림!”
다행히 부상이 크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이등병이라 봐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중대장은 소대장에게 나를 앰블(앰블란스)이 있는 곳으로 보내라고 했다. 이때, 축복받은 사나이가 한 명 탄생하는데, 바로 내
동기 박이병이었다. 박이병은 전날 행군하다 접질린 발목이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발목 하나 삔 거 가지고 훈련에서 열외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를 앰블로 데려가면서 이상병은 박이병의 발목상태도 보고해 동행을 허락받았다.
나와 박이병은 소대장과 이상병의 인솔을 받아 대대OP쪽으로 갔다. 전날의 무리한 행군과 열악한 날씨 탓인지 앰블은 군병원으로 끊임없이 환자를 수송 중이었고, 그곳에는 의무중대장 혼자 있었다. 그는 나를 세심하게 살펴보더니 말했다.
“가츠이병은 215병원 가서 뼈를 맞춰야 될 거 같네. 일단 엑스레이를 찍어봐서 신경이 손상됐는지 확인도 해봐야 되고. 아무래도 후송해야겠다.”
나는 지옥 같은 대대ATT 현장에서 병원으로 후송을 명받았다. 곧 앰블이 도착하고 나는 부분대장과 함께 올라탔다. 이때 천운의 사나이 박이병 또한 얼떨결에 같이 타게 되었다. 그리고 소대장을 뒤로한 채 사창리에 위치한 215병원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앰블 안에서 의무병 아저씨가 말했다.
“이야 이번 훈련 진짜 겁나 빡세게 굴리나 봐요. 오늘만 벌써 몇 번째 후송인지. 대대장이 진짜 애들 다 잡네요! 오, 근데 부분대장 아저씨는 가츠 아저씨 덕분에 야간공격 제끼겠네요? 와아~ 왕축하, 축하축하! 밖에 비 겁나 오는데, 하하.”
“그렇게 되는건가요? 우하하~ 가츠, 굿잡맨~! 좀만 참어. 병원 가면 다 나을 꺼야. 얼레~, 야 박이병 너는 왜 여기있냐?”
“이병 박상만! 의무중대장님이 타라고 하길래 탔습니다!”
그랬다! 당시 정신없이 바빴던 의무중대장은 내 상태만 살피고, 동기인 박이병도 일단 후송을 보내버린 것이다. 그렇게 30-40분을 달려 병원에 도착했다. 당연히 병원에 도착하면, 드라마에서처럼 의사선생님과 의무병들이 달려나와 우리를 응급실로 싣고가서 신속하게 치료하는 줄 알았다. 역시 현실은 아니올시다였다. 걸어서 응급실로 가니, 당직병이 혼자 떡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대대 의무병 아저씨가 상황을 설명해주자,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곧 중위로 보이는 군의관이 오더니 나를 이리저리 살피고는 어이없는 멘트를 날렸다.
“음, 나 이거 해본 적 없는데... 야, 이대위님 어디 계셔? 이대위님 모셔와라!”
그리고는 한참이 지난 후, 대위가 오더니 다시 나를 요리조리 살펴본다.
“야, 얘 데리고 엑스레이 찍고 와! 신경이 괜찮으려나? 애를 어쩌다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냐? 옆에 너, 박상만이병? 넌 어디가 아파? 뭐야, 발목 부었네. 음, 깁스까진 필요없고 붕대 감아줄께.”
그렇게 박이병이 치료받을 동안 난 다시, 엑스레이실로 가서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의무병 아저씨가 투덜거리며 다가온다.
“에이, 잘 시간인데 무슨 엑스레이야? 아 진짜 보직을 바꾸던지 해야지. 기본권이 보장이 안돼.”
그러다가 나를 목격했다.
“헉! 아저씨, 지금 전쟁 났어요? 몰골이 왜 그래요? 팔은 헐~ 우와~ 쩐다! 여기 서봐요. 바로 찍어줄게요!”
그렇게 엑스레이 촬영도 마치고 다시 군의관에게로 돌아갔다. 엑스레이 사진을 한참이나 보더니 다행히 신경 쪽은 이상이 없다며 바로 뼈를 맞춰주시겠단다. 중위와 의무병이 나를 침대에 눕히고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내 몸을 짓누른다. 영화에서 보면 고수들은 스스로 툭 하면서 자기 뼈를 맞추고, 아니면 남의 뼈를 자유자재로 분리했다가 맞춰주곤 한다. 그러나 현실은 역시나! 군의관은 무릎을 내 가슴에 올리더니 이리저리 어깨뼈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다. 캬하... 그 고통은 뭐랄까? 그냥 군의관의 손에 따라 내 몸이 미친 듯 요동을 치며, 신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아아아아!!! 아씨!!! 아프다고요!!! 아아아아아악!!!”
진짜 이렇게 그대로 말했다. 이건 군인의 신분이고 뭐고 없다. 정말 너무 아팠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고 턱 하는 소리가 함께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하하, 성공! 어떠냐? 내 실력이 감쪽 같지? 푸하하하!”
‘개뿔! 디질 뻔했잖아요!’
그렇게 뼈도 맞추고, 팔을 고정시키는 보호대도 받아서 다시 앰블 타고 대대 의무중대로 돌아갔다. 역시 박이병도 같이 갔다. 의무중대에서 총기를 반납하고, 입실신고를 했다. 환자내무실로 들어서니 훈련 초기부터 환자로 열외된 인원들과 훈련 중에 후송되어온 인원들로 가득차 있었다. 밤늦게 마지막으로 도착한 우리들을 보더니 다들 입을 모아 탄성을 질렀다.
“야, 진짜 이번 훈련 제대로구나! 아, 입실해 있어서 다행이다. 저 아저씨들 몰골 좀 봐. 누가 대한민국 군인이라고 하겠어?”
“얼레? 야, 가츠! 박상만!”
내무실 한 구석에서 지난 유격훈련 때 발목을 다쳐 깁스한 김일병이 떡하니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앙, 김일병님!”
“니들이 고생이 많다!”
그렇게 김일병과 나, 박이병은 의무중대에서 대대ATT가 끝날 때까지 잔류했다. 내 군생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입실이었다. 대개 환자들은 말 그대로 환자이기 때문에 점호나 청소를 제외하고는 일체 작업이나 교육이 없다. 그냥 하루 세 끼 밥 먹고 누워자거나 책 보고 TV 보면 된다. 그래서 다들 입실은 군생활 최고의 안식처라고 하는 것이다. 군인에게는 천국보다 더 황홀한 곳이다!
의무중대에서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나와 박이병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다음날도 어김없이 훈련장에서 환자들이 후송되어 왔다. 그들이 전하기를 어제 미친 듯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야간공격을 감행, 절벽에 밧줄로 몸을 감고 오르기를 수차례 반복, 장장 13시간의 걸쳐 야간기동을 했단다. 고참들은 지금 이 시간 개고생하고 있을 텐데 이등병 나부랭이들은 내무실에 누워서 놀고 있으니, 그 후환을 어떻게 감당하리오. 박이병과 나는 서로 손을 꼭 잡고 시간이 멈추기만을 기도했다. 그러나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가는 법! 훈련 마지막 날인 금요일이 어김없이 다가왔고, 의무병들은 우리를 강제로 끌어내서
원대로 복귀시켰다.
그날 저녁, 소대장이 나를 부르더니 물었다.
“너 그 상태로 백일휴가 나갈 수 있겠냐? 부모님 걱정하실 텐데. 가지 말래?”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백일휴가 하나 보고 버틴 덕분인데, 지금도 20일 넘게 늦어진 건데, 또 미루다니. 말도 안돼! 하지만 곧, 훈련일정을 살피더니 이번에 안 가면 다음 훈련 때문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소대장은, 어쩔 수 없이 가야겠다며 부모님께 잘 말씀드리라고 했다. 드디어 나가는구나!대망의 백일휴가 가는 날, 분대장으로부터 철저히 교육을 받고 당직사관과 당직사령에게 신고한 뒤 동기 5명과 함께 위병소를 합법적으로 벗어났다. 그리고 보란 듯이 택시를 잡아타고는,
“사창리로 총알같이 가주세요! 1분 1초가 아까워요.”
“야 가츠야! 근데 너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명색이 백일휴가 나왔는데 보호대 착용하고 있고, 아 내 가슴이 다 아프네.”
택시는 사창리 버스터미널 앞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나는 내리자마자 지긋지긋한 보호대를 목에서 풀고는 쓰레기통에 냅다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오른팔로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면서 외쳤다.
“드디어 나왔다! 기다려라 세상아, 으하하하하!”
동기들과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집으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 고향 이름이 적힌 버스표를 받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집으로 가는구나. 입대하던 날이 떠올랐다. 처음 본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 한 채 돌아설 때 얼마나 슬프고 두려웠던가? 이제는 당당하게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버스는 여러 시간을 달려 집향으로 갔다. 120일만에 돌아온 고향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나만 긴 머리에서 까까머리로, 철부지에서 군기가 바싹 든 군인으로 변해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니 거실에서 어머니가 뛰어나오셨다.
“이기자! 이병 가츠 백일휴가를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이기자~!”
“아들~~!!!”
어머니는 반가운 눈물을 흘리시며 나를 껴안아 주셨다. 그제서야 지난 겨울 춥디 추운 강원도에서 꽁꽁 얼어붙은 내 심장이 뜨겁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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