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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생활백서 5화 - 천사와 악마

 
 자대배치를 받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요일이었다. 아직은 모든 게 낯설었다. 같은 소대원이 30명가량 있는데 아직 이름도 다 외지 못했다. 이름도 모르는데 서열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저 그들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처음 자대로 가면 가장 어려운 점이 고참들의 이름과 서열을 외우는 것이다. 일반적인 중대의 경우 10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그들의 이름과 서열을 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참에게 저기요!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고참들은 당연히 나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들 입장에서는 원래 알고 있던 99명에 내 이름이 하나 추가되는 것뿐이다. 나는 이틀 동안 눈앞에 지나가는 고참들의 이름표만 뚫어져라 보았다. 문제는 그 놈이 다 그 놈 같다는 거다. 죄다 까만 피부에 짧은 머리, 비슷한 말투, 같은 복장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외고 또 외었다.

"가츠, 너 종교행사 어디로 가냐?"
"이병 가츠. 개신교입니다!"

 자다 일어난 분대장은 내게 짧은 질문을 던진 뒤, 이상병에게 나를 잘 데리고 다니라고 말하고는 다시 침상에 대자로 누워 기절해 버렸다. 이상병은 귀엽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고로, 내 키는 181센티미터이고 이상병은 169센티미터, 내 나이는 스물세 살이고 이상병은 스물두 살이었다. 그러나 이상병은 병장 진급을 코앞에 둔 소대 최고의 실세였다. 나는 헤픈 눈웃음을 지으며 이상병에게 교태를 부렸다.

"(부비부비) 이뻐해 주세요~."

 분대장은 어차피 조금 있으면 갈 사람이잖아. 이상병한테 잘 보여야 해! 능력 좋고 마음씨 착한 이상병은 간부들에게도 인정받고, 후임들에게도 존경받는 고참인 것 같았다. 신병 때부터 발휘되기 시작한 샤바샤바 가츠의 얍삽한 잔머리는 포근하게 보듬어줄 고참을 찾아 핑핑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연병장에는 중대 전체의 종교행사 인원들이 집합했다. 역시 개신교가 제일 많았다. 교회로 가는 병사들 중에는 최고 선임이었기 때문에 이상병은 무리를 인솔하러 옆으로 빠져나갔다. 이상병과 떨어지니 왠지 불안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얼굴들뿐이다. 소대원들의 얼굴도 확실하게 다 알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정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내 옆에 나란히 걸어가고 있던 고참 하나가 나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못 본 척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같이 윙크로 대답할 수도 웃을 수도 없고, 이거 뭐 어쩌라는 거야?

"얼레? 이 색히 이거. 고참이 윙크를 하는데도 반응이 없네?"
"이이벼어엉 가아아츠으으! 감사합니다아!"
"머가 감사해?"
"어어 그게..."
"얼씨구~. 이등병이 더듬게 되어 있나?"
"아닙니다아!"

 이 녀석 질이 좋지 않아! 이대로 있다가는 교회 문턱도 못 밟게 생겼다. 이 녀석에게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대열을 이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고참은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며 연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갑자기 앞에서 얌전히 걸어가던 다른 고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썩소(썩은 미소) 한 방을 작렬시켰다.

"얼레? 이 색히 이거! 고참이 웃어주는데도 반응이 없네?"
"이이벼어엉 가아아츠으으! 감사합니다아!"
"머가 감사해?"
‘허걱, 여긴 지옥이다.....’

 교회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정면으로 향한 채, 고참들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옆에 있던 고참은 내게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미 지난 이틀 동안 수십 번
대답했던 질문을 어김없이 또 물어보고 있다.

"여자친구 있냐?"

나는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 분명히 예쁘냐고 물어볼 것이다. 이때 잘 대답해야 된다.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예쁘면 예쁘다고, 못 생겼으면 못 생겼다고 솔직하게 대답해야 된다. 예쁜데 못 생겼다고, 못
생겼는데 예쁘다고 하면 곤란하다. 어떻게 아냐고? 다음 질문이 뻔하다.

"사진 있냐?"

당연히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갑 속에 넣어둔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고참은 나를 한번 훝어보더니,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지난 이틀 동안 사진을 본 고참들은 죄다 같은 반응이다. 이제 다음 질문에 답할 준비를 하자. 다음 질문도 정말 너무 뻔한 질문이다.

"네 여자친구, 친구들 많냐?"

 많으면 어쩔 건데? 나는 솔직하게 다들 남자친구가 있다고 대답했다. 고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러면 다음 질문에 또 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다음 질문도 정말 너무 뻔하다.

"네 여자친구, 여동생은 있냐?"

 있으면 어쩔 건데? 나는 있다고 했다. 그러자 다시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고, 어김없이 이쁘냐고 물어 보았다. 나는 솔직하게 이쁘다고 했고, 고참의 입은 귀에 걸렸다. 그리고는 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어깨동무를 한다. 정말 하나같이 다 똑같다. 그러자 앞에 있던 있던 고참이 고개를 돌려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바로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그는 다시 한 번 내게 썩소를 날리며 물었다.

"가츠야, 나는?"

 뭐 어쩌라고? 답이 안 나온다. 알고 보니 이것들 동기였다. 둘은 내 여자친구의 여동생은 자기 거라고 티격태격거린다. 이거 왠지 불안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둘은 나를 붙잡고는 누구한테 소개시켜 줄 거냐고 물어오았다.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쭈, 이등병이 생각하게 되어 있나?"

 살려줘..... 나는 이미 지칠대로 지쳤다. 교회 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법당으로 간다고 할 걸. 이제와서 후회해도 늦었다. 처음 보는 타 소대의 고참들에게 나는 그렇게 한없이 유린당하고 있었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잡았다.

"가츠야, 내가 누구게?"

 낯익은 얼굴이 자기 이름표를 손으로 가리고는 나를 불렀다. 분명히 그는 나와 같은 소대원인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해 내야 한다. 살려면 기필코 기억해야 된다. 그러나 도저히 기억이 안 난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외로 그는 화를 내기는 커녕, 천사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름표를 가린 손을 내리고 자기 이름을 보여주었다.

"조..O..O.. 상병님?!"
"그래 임마! 이거, 같은 소대원 이름도 모르고 큰 일인데."
"죄송합니다아!"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내 옆으로 와. 같이 가자~."

 그렇게 조상병은 그들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었다. 나는 정말 조상병이 고마웠고, 든든해 보였다. 왠지 믿음이 가는 고참이랄까? 그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괜찮아! 나는 조상병이 건네는 구원의 손길을 덥석 잡았다. 비로소 여자친구의 여동생을 두고 티격태격거리고 있는 악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상병은 내게 별다른 질문도 하지 않았고, 그저 교회를 향해 발길을 재촉하였다. 저 멀리 교회가 보이기 시작했고, 조상병의 안경테가 햇살에 비쳐 반짝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나의 정신적 안식처인 교회에 도착했다. 사실 중학교 이후로는 교회에 거의 가지 않았다. 입대하고서야 매주 꼬박꼬박 가는 셈이다. 그래도 교회에 있으면, 어린 시절의 추억도 떠오르고 조교나 고참들의 간섭이 없기에 참 편안하고 좋았다.
입구에는 같은 분대원인 군종병 김일병이 우리들을 반겨 주었다. 나를 보더니 해맑게 웃으며 등을 두들겨 주었다. 곳곳에서 많은 병사들이 오고 있었기에 우리는 자리를 잡기 위해 서둘러 입장했다. 조상병은 행여 놓칠세라 내 손을 꼭 잡고 어디를 가든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의 손은 참으로 따뜻했다.

"여기 앉을까?"
"네, 감사합니다."
"우리 가츠, 음료수 먹을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아!"
"데끼! 이등병이 거절하게 되어 있나?"
"아닙니다! 캔커피 마시겠습니다!"

 교회 입구에는 음료수 자판기가 있었다. 훈련병 때는 그저 바라만 보는 그림의 떡이었는데, 비로소 군인이 된 기분이었다. 천사 같은 조상병은 음료수 자판기쪽으로 가서 음료수를 뽑았다. 그의 등에서는 투명한 날개 한 쌍이 퍼덕거리고 있었다. 조상병이라면 나의 군생활을 걸어도 될 것만 같았다.
잠시후, 자리로 돌아온 그는 캔커피를 손수 따서 내게 건네주었다. 캔커피 표면에는 차가운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나는 단숨에 캔커피를 들이켰다. 시원한 커피가 목줄기를 타고 넘어갔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면서 살 것 같았다. 문득 앞자리에 앉아 있던 심이병과 눈이 마주 쳤다. 나보다 한 달 선임인 심이병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부러워하는 건가?"

 나는 그의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음료수를 먹고 있는 내가 부러운가 보다 생각했다. 조상병은 내 옆에 바싹 당겨 앉아 친밀하게 어깨 동무를 하더니 이것 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질문과는 격이 달랐다.

"가츠, 몇 살이야?"
"스물세 살입니다!"
"나랑 동갑이네. 완전 반가워! 학교 다니다가 왔어?"
"네, 그렇습니다."
"어디? 아, 중국에 있다 왔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그는 나의 고향, 가족 관계를 비롯해 제대로 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점점 그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있었다. 자기 이야기도 많이 해주면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얼마나 대화를 나눴을까? 조상병에 대한 정보도 많이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마음이 통하는 고참을 만난 기분이었다. 조상병은 내게 중국에서 지낼 때의 에피소드가 없냐고 물어보았다. 다행히도, 입대하기 전에 대학 동기들과 군대에서 써먹을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미리 연습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공부했던 곳은 하얼빈이었는데, 러시아 국경과 무지 가까웠다. 기차로 12시간만 달리면 된다. 기차 타고 12시간이 뭐가 가깝냐고? 중국에서 이 정도는 서울에서 인천 가는 기분으로 움직이는 거리다. 우리 학교에는 러시아 유학생들이 많았다. 하얼빈이라는 도시 자체에 러시아 친구들이 많았다. 술집이나 나이트를 가면, 빛나는 러시아 누나들이 항상 놀고 있었다. 나는 조상병에게 그 러시아 누나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상병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준비된 구라에 귀를 기울였다.

"너, 완전 재밌구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내 옆에만 붙어 있어. 마구마구 사랑해 주마!"

 친구들과 미리 특훈을 한 보람이 있었다. 조상병은 이미 내게 완전히 매료당했고, 나는 든든한 우군을 한 명 만들었다. 종교행사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고, 조상병과 나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부대로 복귀했다.
갓 진급한 조상병은 전역이 1년이나 남았다. 이제 그와 함께 1년 동안 편하게 지낼 수 있게된 것이다. 그가 전역할 때쯤이면 나도 엄연한 상병이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병장 달 때까지 함께했으면 좋겠다. 벌써부터 행복한 군생활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행복한 하루가 저물고 어느 새 점호 청소시간이 되었다. 나는 고참들의 지시를 받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청소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걸레를 깨끗이 빨아서 내무실로 뛰어가다가 누군가와 정통으로 부딪혔다. 막내인 나와 부딪힌 사람은 분명히 고참일 것이다. 화들짝 놀라서 올려다보니, 조상병이었다. ‘다행이다~. 천사같은 조상병님이구나!’ 다소 심하게 부딪힌 조상병은 잠깐 기우뚱거리더니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약간은 안심하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조상병의 눈빛이 이상했다. 화장실 조명에 반사되는
안경테 사이로 보이는 조상병의 눈동자는 낮에 교회에서 봤던 그의 따스한 눈동자가 아니었다.

"야이 씨, 미친 색히! 정신 안 차려? 완전 개념을 상실 했구만!"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하면 다야? 아놔, 이거 눈알을 확 뽑아버려? 어? 어!"
"죄송합니다!"
"이거 이등병이 완전 빠져 가지고. 요즘 군대 편하지? 장난 같지? 아주 캠프를 왔구만!"
"죄송합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조상병은 악마 그 자체였다. 나는 화장실 벽에 등을 바싹 대고 조상병으로부터 기나긴 갈굼을 온 몸으로 받았다. 내 머릿속에는 낮에 보았던 조상병의 천사같은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것이 조작되었던 것이다. 조상병은 신나게 나를 갈구고는 내무실로 돌아갔다. 화장실
바닥에는 미처 비상하지도 못하고 추락해버린 불쌍한 이등병 하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화장실 형광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걸레를 빨고 있던 심이병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조상병, 싸이코야. 이중인격자라구!"

 한달 고참인 심이병과 군종병 김이병, 나보다 3주 먼저 자대배치를 받은 동기 박이병까지 이미 조상병의 먹잇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교회에서 나를 바라보던 심이병의 눈빛을 알 수 있었다. 부러워하는게 아니라 불쌍해하는 눈빛이었던 것이다.

조상병이 전역하려면 아직 1년이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