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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생활백서 4화 - 폭풍구보


가츠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하는 것은 걷기, 달리기, 등산 같은 유산소 운동이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까지 걸어서 10분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툭하면 버스나 택시를 타고 다녔다. 그렇다고 0.1톤에 가까운 체형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181센티미터/76킬로그램의 멀쩡한 육체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현격히 떨어지는 기초체력으로 인해 근근히 연명하고 있는 상태였다. 2년 반 동안의 중국유학 시절에는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향락의 시간을 보냈고, 귀국한 뒤에는 곧 입대한답시고 다시 6개월간 한층 더 빡세게 놀다 입대했다. 그러니 그 무렵의 내 체력은 허접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저질 체력이 자대 배치를 받자마자 엄청난 시련을 내게 몰고왔다.

내가 근무한 이기자 부대(제 27 보병사단)는 강원도 전방의 예비사단, 다시 말해 소총 부대였다. 몇몇 메이커 부대들이 기계화 사단으로 전환된 시점에도, 육군을 통털어 가장 많은 훈련을 소화하고 있던 이기자 부대는 여전히 속칭 ‘땅개’ 부대였다. 험준한 산악으로 이루어진 작계(작전계획)지역을 항상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소총수에게 필요한 건 첫째가 체력이요, 둘째도 체력이요, 셋째도 체력이다. 정신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무리 강한 정신력도 육체가 못 버티면 끝인 거다. 그런데 허접한 저질 체력의 소유자 가츠군은 102보충대를 거쳐, 공교롭게도 빡세기로 소문난 27사단의 말단 소총수로 배정되었던 것이다.

전입 동기 4명과 함께 중대 행정반에 그대로 얼어있는 가츠군, 동기들 중에 가장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았다. 곧 들이닥친 각 소대 분대장들. 어찌나 하나같이 인상이  살벌하던지 눈도 마주치기 두려웠다. 원래 병장쯤 되면 사회 나갈 준비를 하면서 뽀얀 피부와 해맑은 미소를 갖추는 게 일반적인데, 우리 중대 분대장들은 완전히 인민공화국 전사들 같았다. 간부들이 모두 회의를 갔기 때문에 행정반에는 계원(행정병)들과 분대장들, 그리고 우리들 전입 신병 5명만 있었다. 분대장들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수군거린다.“오호, 저 색히 덩치 좋은데. 우리가 데려갈래!”“야, 저번에 떡대 두 놈, 느그들이 가져갔잖아. 이번엔 우리 소대 차례다!”“야이 XX놈아, 그 개 XX같은 놈들, 완전 덩치만 컸지, 개 폐급이야. 고지 하나 넘는데 기절이나 쳐하고, 엄살은 존내 심하고. 그 XX색히, 갈아 마셔버릴 뻔 했잖아.”“아, 암튼 그건 니네 사정이고, 이번에는 우리가 저 놈 데려간다.”

우시장에서나 나눌 법한 으스스한 그들의 대화를 듣다 보니,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서로 나를 데려간다고?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소총 부대에서는 주종목인 행군을 할 때 낙오하지 않는 신병이 최고다. 일단 신병이 튼튼하면 신병 군장에 이것저것 부담없이 때려넣을 수 있다. 신병 군장이 무거워질수록 고참 군장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반면 신병이 약하고 비실비실하면 오히려 신병 군장 품목을 고참들이 대신 챙겨가야 하고, 행여 낙오라도 하면 그야말로 난리나는 거다. 중대장의 갈굼은 기본이요, 그로부터 줄줄이 이어지는 내리갈굼. 그래서 분대장들은 최선을 다해 자기 소대와 분대로 강인한 신병을 데려가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유난히 악랄해 보이는 분대장 하나가 내게 물었다.
“야, 너 어디갈래? 1소대? 2소대? 3소대?”

왜 하필 내게 먼저 질문을 하는 거야? 나는 23년 묵은 뇌를 태어나서 가장 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일까? 때마침 간부들이 들어왔다. 간부들을 보자마자 계원들이 달려들었다.
1소대장님, 이것 좀 확인해주셔야 됩니다.”
포반장님, 지금 탄 반납하러 오시랍니다.”
3소대장님, 황원기 이병 의무중대 진료 받으러 갔습니다.”
순간, 3소대장이 가장 선해보였고, 그의 미소 띤 얼굴이 내 군생활을 평탄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분대장에게 당당하게 외쳤다.“3소대 가고 싶습니다!”
순간, 행정반에 있던 모든 시선이 나를 주시했다. 분대장들은 오호~ 놀랍다는 표정이었고, 계원들은 세상에서 가장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간부들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이번에도 어김없이 미친 놈 하나 들어왔군 하는 표정을 지었다. 3소대장이 한결 해맑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헤이, 보이~.”“이병 가츠.”“으응, 머라구~?”“이병 가아아츠으으!”“머라는겨?”“이이이벼어엉 가아아츠츠으으!!”“아, 3소대 오고 싶다고?”“네, 그렇습니다!”“웰컴 투 천사의 집이다, 껄껄껄!”
천사의 집이라고? 이게 뭐지? 내가 정말 환상적인 초이스를 한 건가? 아무튼, 나중에 알게 된 천사의 집 아빠, 엄마의 프로필이다.

소대장 중위 이ㅇㅇ 모 대학 체육학과 ROTC 출신. 땅땅한 체격에 선한 인상의 소유자. 독실한 기독교인. 천사의 집 원장. 이등병 킬러. 폭발하는 순간 콤비네이션 발차기가 발동된다. 사고 병사들을 친히 자기 소대로 편입시켜 무사 전역을 위해 앞장선다.
부소대장 하사 최ㅇㅇ 사병 출신 부사관. 사실 진작에 중사로 진급했어야 했지만, 각종 폭행사건으로 인해 전역 때까지 하사를 달았던 육군 최고 왕고(참) 하사. 3소대 부소대장으로 임명되면서 급 변신하여 이등병들의 천사로 강림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면면이다. 이로써 3소대 1분대 2번 소총수 가츠의 파란만장한 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 내 저질 체력은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았고, 소대 유망주로서 고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점호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딱 2박 3일간의 행복이었다. 훈련소에서 한 달간 못 피운 담배를 주말 내내 고참 손에 이끌러 나가서 신나게 피웠다. 여자친구에게 마음껏 전화도 하고, PX에 가서 기름진 냉동(식품)과 과자에다 음료수도 배 터지게 먹었다. 잠깐 동안 ‘여기는 정말 천사의 집이구나!’ 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리고 일요일 저녁이 되었고, 중대 당직사관은 우리 소대장이었다. 전역을 4개월 앞둔 천사의 집 원장. 역시 말년이라서 그런까? 주말 내내 중대원들을 푹 쉬게 해주었다. 저녁점호도 쉬엄쉬엄 끝났고, TV 시청시간도 한 시간 연장시켜 주었다. 집보다 더 집같은 분위기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분대장들의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시바! 하필 오늘이 우리 소대장당직이냐? 토요일날 당직하셨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게 말이야, 내일 또 폭풍구보 하겠네. 깔바지 벗고 점호 나가야 되겠군.”
그때, 옆자리에 누워있던 군종병 김일병이 말을 건넸다. (김일병은 천사의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천사였다. 지난 이틀간, 항상 웃으며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나보다 3주 먼저 들어온 동기 녀석은 김일병이 후임들을 갈구지 않는 착한 선임이라고 내게 알려주었다.)
“가츠야, 내일 아침점호 끝나면 우리 소대장님 인솔 하에 아침구보를 해. 근데 우리 소대장님이 뛰는 걸 겁나 귀찮아하시거든. 그래서 아침구보 할 때 내리 풀스피드로 달리신다는 거지. 보통 대대 전원이 뛰기 때문에 3킬로미터 뛸 때 한 10분 정도 걸리는데, 우리 소대장님은 앞 중대들 다 따라잡으면서 처음 스피드 그대로 질주하셔. 내일 낙오하지 말고 잘 뛰어야 해!”
‘아, X됐다!’

 내가 3킬로미터를 언제 뛰어봤더라. 고등학교 체력장도 1500미터였다. 아, 정녕 3킬로미터를 뛰어본 적이 없는 건가? 그냥 정상적인 속도로 3킬로를 뛰어도 완주할 수 있을까 걱정 되는 마당에, 이건 뭐 전설의 폭풍구보란다. 원래 취사장 식사 순서에 맞춰서 중대별로 순서대로 위병소를 출발하는데, 꼴찌로 출발 했던 5중대가 본부중대를 비롯한 다른 중대를 모두 따라잡아 버리고 일등으로 복귀했단다. 아아아~,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이 올 리가 없지. 지금 난 소대 유망주로 한껏 기대를 받고 있는 몸인데. 아침해가 뜨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재깍재깍! 6시 10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10분...... 아직도 기억난다.
‘제발 비가 와라! 비가 와라! 비가 와라, 아니 전쟁이나 터져라!’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국방부 시계는 가차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6시가 되자 불침번이 외친다.
“기상하십시오! 기상하십시오! 금일 6시 20분 아침점호 집합입니다!”
분대장은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어김없이 담배를 피러 가자고 했다.
“가츠, 베이비~ 우린 담배나 피러 가자꾸나~ 룰루랄라~
얼마 후 중대 사열대 앞에서 당직병의 인원 및 총기 보고를 시작으로 아침점호가 시작되었다. 도수체조까지 마친고 구보가 시작되었다. 위병소 밖으로 나가는 걸음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드디어 악몽의 알통구보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2번 소총수였기 때문에 분대장 바로 뒤에서 뛰었다. 하지만 맨 앞에 있는 분대장들은 절대 발을 맞춰 뛰지 않는다. 안 그래도 발맞추며 뛰기가 어색한 내 바로 앞에서 자기 마음대로 뛰는 분대장은 최악의 페이스메이커였다! 위병소를 벗어나자마자 중대 맨 앞에 위치한 소대장은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우리 소대는 중대 맨 뒤에서 뛴다. 1소대, 2소대, 본부포반이 순서대로 총알처럼 뛰쳐나간다.
우리소대 선임분대장이 소리친다.
3소대 뛰어!”
“악!”
“군가한다, 군가는 구보가! 하나, , , !”

산비탈을 휘도는 안개길 따라아침을 열어주는 사나이 함성
맨주먹 불끈 쥐고 정상을 향해발 맞춰 뛰어간다 우리는 무적
군화소리 착착착 승리를 위해
박수소리 착착착 영광을 위해

이거 내리막길도 벗어나기 전에 숨이 차오른다. 내 좌우, 그리고 뒤에서는 3중 콤비네이션 갈굼이 시작되었다.  
“야이 색히야, 발 안맞춰? 군가 몰라?”
내 생애 최장거리인 반환점을 돌면서부터는 하늘이 노랗게 보이며 허벅지와 종아리에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지막 500미터, 마의 오르막 코스에 당도했다. 내 뒤는 군종병인 김일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천사 김일병이 내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놈, 야 가츠 미쳤나? 군생활 그만하고 싶냐?”
3소대에서 낙오는 천사마저도 악마로 만든다. 결국 나는 오르막 코스에서 대열을 완전히 이탈하고 말았다. 소대 유망주에서 고문관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전입 동기들도 하나 둘씩 낙오하기 시작했다. 내심 그 녀석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역시 군대는 동기밖에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얼마 후, 낙오한 신병들을 추스린 부분대장과 함께 중대 사열대 앞으로 도착했다. 사열대 위에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소대장, 사열대 앞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100명의 중대원들. 아찔했다.
점호가 끝난 뒤 분대장이 막사 뒤 커피 자판기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상담이  시작되었다.
“너 왜 못 뛰어? 어디 아픈 거야? 이상하네? 왜 못 뛸까? 너, 안 뛰는 거지? 음... 일단 담배 피우지 마! ”
헐, 금연이란다..... 아, 그냥 때리지...  마구마구 때리지... 왜 하필 금연이야? 왜?
그랬다. 그 후로 정확히 9일간 담배를 피우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의 아픔은 나를 철인으로 만들어 주었고, 나를 최고의 이기자 소총수로 만들어주었다. 그 뒤로 내 군생활에서 낙오란 단어는 사라졌고, 낙오하는 후임들을 악랄하게 갈구는 악랄 가츠만이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