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탄속 부상 당한 나를 살린건 16세 한인 군무원”
○ 카라차스 소위의 또다른 전쟁 7년동안 11차례 수술 복부엔 그날의 상흔 뚜렷
○ 좌우 내전서 싹튼 반공의식 자유와 평화 지키려 참전 “우리의 소원도 남북 통일”
《1951년 10월 3일 오후 6시 강원 철원 인근 ‘스코치 313고지’. 알렉산드로 스 카라차스 소위가 막 참호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몸을 숙이는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뭔가가 복부를 관통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누군가 그를 질질 끌고 조금씩 뒤로 옮기는 걸 느꼈다. 카라차스 소위가 벌여야 했던 길고 긴 또 다른 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 카라차스 소위의 참전기
18일 그리스 아테네 국회의사당 인근에 자리한 그리스한국전참전용사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카라차스 씨(84)는 여느 노인이나 다름없었다. 세월의 흔적이 쌓인 굽은 등, 주인만큼 연륜이 엿보이는 낡은 파이프 담배…. 카라차스 씨가 상의를 올려 보여준 복부엔 전쟁의 비참함이 연대기처럼 새겨져 있었다.
313고지 전투는 미군이 좌우를 맡고 그리스군이 중앙을 담당하는 식으로 전개됐다. 유엔군은 3개 사단, 중공군은 9개 사단이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 미군이 진격을 못하자 그리스군은 3면에서 공격을 받게 됐다. 카라차스 소위의 부대도 중공군의 집중 포화에 갇혔다.
당시 그의 부상은 심각했다. 파편이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가 배 앞부분으로 튀어나왔다. 갈비뼈 2개가 없어지고 간도 절반 정도 손실됐다. 십이지장도 반밖에 남지 않았다. 오른팔과 왼쪽 다리에도 파편이 박혔다.
그는 일본 도쿄(東京)로 후송돼 7번 수술대에 올랐다. 그는 “동료들이 나를 나사로(예수가 부활시킨 성서 속의 인물)라고 불렀다.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났기 때문이다”며 “지금도 복부가 밭을 갈아놓은 듯하다”고 말했다. 카라차스 씨는 그리스로 돌아온 뒤에도 4번의 수술을 더 받았다. 11번의 수술이 끝날 때까지 7년이 걸렸다.
카라차스 소위가 부상했을 때 그를 구출한 사람은 한국인이었다. 그는 “16세의 김 씨라고만 알고 있다. 나를 따르던 군무원이었는데 막사에 있으라고 했더니 어느새 내 곁에 와 있었던 것 같다”며 “포탄이 비 오듯 쏟아져 김 씨가 몸을 땅에 붙인 채 내 군복 뒷덜미를 잡고 끌었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도 낡은 사진 속에 있는 김 씨를 수소문하고 있다.
카라차스 씨는 이후 독일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뒤 경기 여주에 있는 그리스참전비를 설계하는 등 6·25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되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 그들은 왜 한국에 갔나
그리스는 1950년 11월부터 보병 1만여 명과 수송기 1개 편대를 한국에 파병했다. 보병은 미 1사단에 배속돼 철원과 경기 이천 지역 등 주요 거점에서 많은 전과를 거뒀다. 특히 전쟁 막바지인 1953년 6월 강원 김화-철원-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에서 벌어진 해리고지 사수작전은 6·25전쟁 사상 아주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 해리고지 전투는 현재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참전용사들은 하나같이 6·25전쟁에 참전한 이유에 대해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하지만 자유와 평화라는 대의를 목숨과 바꿀 수 있을까. 돈벌이 목적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파병 군인의 98%는 자원해 참전했고, 당시 사병 월급은 20달러 정도로 그리스 기업의 평균 월급인 100달러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리스는 6·25전쟁 직전인 1944∼1949년 정부군과 공산군 간 심각한 내전을 겪었다. 사망자가 5만 명에 달했다. 게릴라전으로 진행된 내전에선 한국에서처럼 가족마저도 좌우로 갈려 서로 총부리를 겨눴다. 이 때문에 당시 그리스에서는 반공 정서가 매우 강했다. 현지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이후 최대 규모의 군인이 해외로 파병됐다고들 한다.
6·25전쟁 때 목에 박힌 파편을 아직까지 제거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콘스탄티노스 피시오티스 씨(85)는 “내게 한국전쟁은 그리스 내전에 이은 2번째 전쟁이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고 말했다. 공군 조종사로 참전한 아크리보스 촐라키스 씨(80)는 “한국에 갔을 때 한복 입은 여자들은 왜 허리띠를 가슴에 맬까 하고 의아해할 정도로 한국을 전혀 몰랐지만 우리에게는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이상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스틸리아노스 드라코스 참전용사협회장은 “우리의 작은 도움으로 한국이 성공한 나라가 돼 고맙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참전용사들이 눈을 감기 전에 한국이 통일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릴 잊지않고…”그리스 현지 취재하자 한국전참전協 감사패 전달▼
○ 좌우 내전서 싹튼 반공의식 자유와 평화 지키려 참전 “우리의 소원도 남북 통일”
《1951년 10월 3일 오후 6시 강원 철원 인근 ‘스코치 313고지’. 알렉산드로 스 카라차스 소위가 막 참호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몸을 숙이는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뭔가가 복부를 관통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누군가 그를 질질 끌고 조금씩 뒤로 옮기는 걸 느꼈다. 카라차스 소위가 벌여야 했던 길고 긴 또 다른 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 카라차스 소위의 참전기
18일 그리스 아테네 국회의사당 인근에 자리한 그리스한국전참전용사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카라차스 씨(84)는 여느 노인이나 다름없었다. 세월의 흔적이 쌓인 굽은 등, 주인만큼 연륜이 엿보이는 낡은 파이프 담배…. 카라차스 씨가 상의를 올려 보여준 복부엔 전쟁의 비참함이 연대기처럼 새겨져 있었다.
313고지 전투는 미군이 좌우를 맡고 그리스군이 중앙을 담당하는 식으로 전개됐다. 유엔군은 3개 사단, 중공군은 9개 사단이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 미군이 진격을 못하자 그리스군은 3면에서 공격을 받게 됐다. 카라차스 소위의 부대도 중공군의 집중 포화에 갇혔다.
당시 그의 부상은 심각했다. 파편이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가 배 앞부분으로 튀어나왔다. 갈비뼈 2개가 없어지고 간도 절반 정도 손실됐다. 십이지장도 반밖에 남지 않았다. 오른팔과 왼쪽 다리에도 파편이 박혔다.
그는 일본 도쿄(東京)로 후송돼 7번 수술대에 올랐다. 그는 “동료들이 나를 나사로(예수가 부활시킨 성서 속의 인물)라고 불렀다.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났기 때문이다”며 “지금도 복부가 밭을 갈아놓은 듯하다”고 말했다. 카라차스 씨는 그리스로 돌아온 뒤에도 4번의 수술을 더 받았다. 11번의 수술이 끝날 때까지 7년이 걸렸다.
카라차스 소위가 부상했을 때 그를 구출한 사람은 한국인이었다. 그는 “16세의 김 씨라고만 알고 있다. 나를 따르던 군무원이었는데 막사에 있으라고 했더니 어느새 내 곁에 와 있었던 것 같다”며 “포탄이 비 오듯 쏟아져 김 씨가 몸을 땅에 붙인 채 내 군복 뒷덜미를 잡고 끌었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도 낡은 사진 속에 있는 김 씨를 수소문하고 있다.
카라차스 씨는 이후 독일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뒤 경기 여주에 있는 그리스참전비를 설계하는 등 6·25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되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 그들은 왜 한국에 갔나
그리스는 1950년 11월부터 보병 1만여 명과 수송기 1개 편대를 한국에 파병했다. 보병은 미 1사단에 배속돼 철원과 경기 이천 지역 등 주요 거점에서 많은 전과를 거뒀다. 특히 전쟁 막바지인 1953년 6월 강원 김화-철원-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에서 벌어진 해리고지 사수작전은 6·25전쟁 사상 아주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 해리고지 전투는 현재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참전용사들은 하나같이 6·25전쟁에 참전한 이유에 대해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하지만 자유와 평화라는 대의를 목숨과 바꿀 수 있을까. 돈벌이 목적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파병 군인의 98%는 자원해 참전했고, 당시 사병 월급은 20달러 정도로 그리스 기업의 평균 월급인 100달러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리스는 6·25전쟁 직전인 1944∼1949년 정부군과 공산군 간 심각한 내전을 겪었다. 사망자가 5만 명에 달했다. 게릴라전으로 진행된 내전에선 한국에서처럼 가족마저도 좌우로 갈려 서로 총부리를 겨눴다. 이 때문에 당시 그리스에서는 반공 정서가 매우 강했다. 현지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이후 최대 규모의 군인이 해외로 파병됐다고들 한다.
6·25전쟁 때 목에 박힌 파편을 아직까지 제거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콘스탄티노스 피시오티스 씨(85)는 “내게 한국전쟁은 그리스 내전에 이은 2번째 전쟁이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고 말했다. 공군 조종사로 참전한 아크리보스 촐라키스 씨(80)는 “한국에 갔을 때 한복 입은 여자들은 왜 허리띠를 가슴에 맬까 하고 의아해할 정도로 한국을 전혀 몰랐지만 우리에게는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이상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스틸리아노스 드라코스 참전용사협회장은 “우리의 작은 도움으로 한국이 성공한 나라가 돼 고맙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참전용사들이 눈을 감기 전에 한국이 통일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릴 잊지않고…”그리스 현지 취재하자 한국전참전協 감사패 전달▼
그리스한국전참전용사협회는 21일 동아일보에 그리스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취재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담은 명예패(Honoris Causa·사진)를 전달했다. 명예패는 6·25전쟁 파병 당시 그리스군의 문양을 본떴다.
스틸리아노스 드라코스 협회장은 이날 전몰용사 추모식에서 “전장에서 숭고한 생명을 희생한 동료전사들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기를 기원하는 오늘 이 거룩한 추모식에 동아일보가 참여해 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며 명예패를 전달했다. 그는 또 “한국을 대표하는 신문사의 이번 취재가 한국과 그리스 간 친선관계 증대에 기여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명예패 증정은 당초 이날 행사 일정에는 없었다. 참전용사협회 측은 동아일보가 그리스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조명하기 위해 직접 기자를 파견했다는 점에 감동해 명예패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를 대표해 패를 받은 기자는 “그리스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삼을 정도로 한국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데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6·25전쟁 영웅들을 조명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큰 박수로 화답했다. 이날 행사는 6·25전쟁 전몰용사 추모비가 있는 아테네 인근 파파고스 시에서 열렸으며 참전용사 80여 명과 장태신 주그리스 한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단신 월남 → 소년 통역병 → 신학생 → 사업가 역경의 ‘그리스 드림’ 그리스軍 입대 한국인 알렉산드로스 장 씨 스토리▼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만나기 위해 그리스 아테네를 찾은 18일, 한 동양인이 그리스한국전참전용사협회 사무실에 들어오더니 기자의 손을 꼭 잡았다. “나, 알렉산드로스 장이라고 하오. 참전용사협회 회원이오.” 북한 억양이 녹아 있었다.
한국명 장려상 씨(74). 그는 그리스한국전참전용사협회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이다. 고향은 평양. 장 씨의 인생 역정은 14세 때이던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장 씨는 지하반공활동을 벌이던 친형 때문에 가족과 함께 토굴 등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 그해 12월 대동강을 건너 홀로 월남했다. “연합군이 퇴각할 때 대동강 다리를 끊었어. 강이 얼어 있었는데 가운데는 배가 지날 수 있게 얼음이 깨져 있었지. 그래서 거기를 헤엄쳐 건넜어.”
남한으로 건너온 뒤 그는 먹고살기 위해 그리스군 군무원으로 입대했다. 당시 연합군은 군수물자 보급 등을 위해 한국인들을 고용하곤 했다. 머리가 좋았던 장 씨는 다른 사람보다 빨리 그리스어를 배웠다. 덕분에 1951년 말 부대장 통역원으로 진급했다. 정식 그리스군 병사가 된 것이다.
장 씨의 업무는 통역과 군수품 보급이었지만 전투가 일어나면 총을 들고 나가야 했다. 전투요원과 행정병 간 구분이 없었다. 장 씨도 철원 낙타고지에서 다리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군이 1955년 본국으로 철수할 무렵 장 씨는 그리스 정부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다른 병사들과 함께 아테네에 첫발을 디뎠다. 처음에는 아테네대 신학대를 다녔다. 사람들은 장 씨가 한국인 최초의 그리스정교회 신부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같은 학교 고고학과를 한 번 더 다닌 뒤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리스정교회가 한국에 교회를 세울 때 나를 신부로 파견하려고 했어. 그런데 월남 이후 혼자 살다 보니 가족이 그립더군.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 보통 사람의 삶을 살기로 했지.”
장 씨는 현지인과 결혼한 뒤 군납사업을 크게 했다. 아테네 상공회의소 위원, 그리스 신민당 교육분과 위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성공한 기업인이 됐다.
▼“방랑시인 ‘김삿갓’을 아시오?” 참전 유가족 마초카스씨 한국 문학 전도사 맹활약▼
벽안의 그리스인이 대뜸 시인 ‘김평연’을 아느냐고 물었다. 당황한 기자에게 그는 다시 ‘김삿갓’이라고 발음했다.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병연에 대한 질문이었다.
드미트리오스 마초카스 씨(73). 여덟 살 많은 형이 6·25전쟁에 소위로 참전했다가 1951년 사망한 전몰 유가족이다. 전사한 형 때문에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통신회사에 다니다 은퇴한 뒤 개인적으로 한국 문학을 그리스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정리한 문집 ‘한국시선집(Anthology of Korean Poetry)’은 고려가요, 한시, 판소리, 근현대시 등 375편을 담고 있다. 시인도 윤선도, 정철, 조지훈, 이육사 등 86명이 소개돼 있다. 신화의 나라 그리스에서 내는 책답게 첫머리에는 한국 문학의 철학과 정서를 가늠할 수 있도록 단군신화를 수록했다.
마초카스 씨는 “한국 문학은 왕에 대한 충성, 자연에 대한 애정, 부모에 대한 공경 등을 담고 있는 게 특징”이라며 “몇 년 전 그리스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발간하는 소식지를 접한 뒤 한국 문학에 매료됐다”고 설명했다.
마초카스 씨는 6·25전쟁의 발발 배경도 연구하고 있다. 그는 미국 우드로윌슨센터 등에서 자료를 입수해 1949년 중국과 소련 간 비밀협정, 소련과 북한 간 전보 등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수많은 사료가 한국전쟁 발발의 원인이 북한에 있다는 점을 증명해주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미국이나 남한 측의 전쟁 유도설 등이 나오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글·사진 아테네·파파고스=고기정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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