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잃은 충격에 어린 딸 보듬지 못해… 비극의 악순환”
48시간 전투 끝내고 쉬던 남편 나무에 떨어진 유탄 맞아
부대원 1000명중 그이만 사망
결혼 7년만에 날벼락 소식 듣고 눈물도 닦지 못한채 ‘생존 전쟁’
딸도 깊은 상처… 아빠얘기 안해
“딸은 아버지가 죽은 순간 어머니마저 잃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딸의 옆자리를 지키지 못했죠. 나 또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또 생활을 이어가는 데 급급했어요. 그게 바로 전쟁의 비극이지요.”
호주 시드니 항으로 연결되는 파라마타 강 하구의 드러모인 지역. 강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 아담한 자택에서 만난 올윈 그린 여사(87)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 몸부림쳤다고 회고했다. 그 고통은 남편이 죽던 해 세 살밖에 안 된 외동딸 앤시아(63)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 6월 29일. 호주 정부는 6·25전쟁 발발 4일 만에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참전을 결정했다. 해군 바탄호가 유엔군 휘하에 배속됐고 공군 77비행중대가 곧바로 전쟁에 투입됐다. 일본 점령군으로 배치됐던 호주 육군 3대대는 영연방 27여단에 배속돼 9월 28일 부산항에 도착해 북진에 나섰다. 바로 남편 찰리 그린 중령이 지휘하던 부대였다.
10월 말 4주 만에 약 650km를 행군해 평안북도 정주에 도착한 3대대는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밤에는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질 정도로 추웠다. 10월 29일 오전 10시에 시작된 격렬한 전투는 밤 11시에야 끝났다. 9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당한 이날 전투 끝에 호주군은 북한군을 압록강 쪽으로 몰아냈다.
“48시간 동안 잠도 못자고 전투를 벌였던 찰리는 30일 저녁 텐트 인근에 떨어진 포탄 5발 가운데서 나무에 떨어진 유탄에 맞았어요.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근처에 1000명이 있었는데…. 단 한 사람의 사망자가 바로 찰리였어요.”
갑작스레 날아온 남편의 전사 소식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애도 편지도 그의 슬픔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충격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모르겠다”며 “아직도 당시의 충격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편이 사망 며칠 전에 썼던 편지는 전사 통보를 받은 다음 날인 11월 2일 도착했다.
‘정말 너무나 춥소. 최종 목적지(압록강)까지 약 20마일(32km) 정도를 남겨두고 있어요. 거기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끝날 거요. 조만간 집에 돌아가길 바라고 있소.’(10월 27일 편지)
남편의 전사 이후 그린 여사는 생존을 위한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딸 앤시아와 함께 먹고살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신혼의 단꿈이 남아있던 농촌마을 그래프턴을 떠났다.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시드니에서 생활했다. 누군가 앤시아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친정의 도움이 필요했다. 남편의 사망으로 받은 연금과 참전용사들의 장학금으로 시드니대에 입학한 그는 졸업 이후 20여 년간 시드니기술전문대(TAFE)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다.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났지만 앤시아가 자라면서 겪은 성장통을 보듬어주지 못한 것은 평생의 짐으로 남았다. “남편이 죽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나중에 아이에게 설명해 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요. 그걸 제대로 설명했어야 했는데….”
아버지의 부재(不在)를 느끼게 된 사춘기 시절, 앤시아는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것으로 마음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앤시아는 성공적인 삶을 꾸려왔다. 앤시아는 현재 청각장애 참전군인과 아동을 돕는 정부기관인 호주청각서비스(AH)의 셰퍼드지역 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그린 여사는 “앤시아가 AH에서 활동하게 된 것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자들은 음악가와 종교학자로 성장했다.
그린 여사는 1993년 남편과 함께한 7년, 그리고 남편을 생각하며 지낸 60년을 회고하며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라는 책을 냈다. 최근 개정판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는 “남편으로만 알았던 찰리였지만 동료들의 증언과 전쟁기념관에 있던 기록을 모아 책을 쓰면서 ‘군인 찰리’의 모습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들었을 법한 질문을 던졌다. “왜 재혼하지 않으셨죠?”라고. 그린 여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도 가책과 충심(guilty and loyalty) 때문일 겁니다.”
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중동에 배치돼 호주군 최연소 보병 대대장으로 전공을 세웠다. 결혼 이후에도 콜롬보, 뉴기니 내전에 참전했다. 농부 출신인 찰리는 전장에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싶었지만 새색시는 도시 생활에 익숙한 상태였다. 일자리를 찾기 힘들던 찰리는 군에 다시 복귀했다가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린 여사는 “내가 찰리를 군에 다시 보냈다는 죄책감과 그에 대한 기억 때문에 혼자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린 여사는 회고록 맺음말에서 이런 자신의 심정을 아이다 프록터의 시 ‘그 사람(The One)’으로 대변했다.
‘We cannot weep/At tragedy for millions/But for one./In the mind/For the mind's life/The one lives on. 무수한 사람들의 비극엔/눈물짓지 못하지만/단 한 사람의 비극엔/눈물짓는답니다./마음의 삶을 살고픈/마음속에서/그 사람은 영원히 산답니다.’(번역: 김준환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그린 여사에게 이제 남편은 수호신 같은 존재인 듯했다. 그는 “항상 찰리의 영혼이 나를 보살펴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며칠 전 그가 잠시 나에게 소홀했던 것 같다. 자동차를 몰고 나갔다가 딱지를 떼였다”며 활짝 웃었다.
남편을 앗아간 6·25전쟁과 한국에 서운함이 있을 듯도 하지만 그린 여사는 “한국인들은 호주군의 참전에 대해 끊임없이 진정으로 고마워한다”며 “한국인들과 좋은 우정을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시드니·캔버라=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 “오늘은 1951년 1월 5일, 갑자기 후퇴명령이…”
소위로 참전 크로퍼드 씨… 하루도 빠짐없이 전장일기 써
‘무전으로 급히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인천이 곧 적의 포화에 노출되니 모든 병력은 오전 2시까지 떠나라고 했다. 미군이 남은 장비들을 모두 폭파할 때 3km 떨어진 해상에 정박한 실론호에서도 섬광을 볼 수 있었다. 큰 진동이 느껴졌다. 1951년 1월 5일.’
해군 소위로 6·25전쟁에 참여한 이언 크로퍼드 씨(78·예비역 소장)는 빛바랜 일기장을 펼치며 과거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동안 받은 수많은 훈장보다 더 소중하게 보관해온 삶의 기록이다. 크로퍼드 씨는 “요즘엔 매년 초에만 일기를 쓰다가 한 달도 못 가 그만두곤 하지만 전쟁 중에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록을 남겼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 군함 실론호를 타고 6·25전쟁에 참가했다. 1950년 8월 부산항에 입항한 실론호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합류해 호주군의 바탄호, 와라뭉가호와 함께 해상 함포 사격으로 육군과 해병대를 지원했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한 뒤 실론호는 호주 구축함과 함께 다시 전장에 투입돼 대청도와 진남포를 오가며 함포 사격과 군 병력 수송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일기장을 넘기며 1950년의 크리스마스를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호주 장교지만 홀로 영국 함정에서 근무했던 그는 호주 정부가 호주군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다는 소식을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다.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보트를 타고 인근 해역에 있던 와라뭉가호에 가서 선물을 챙겨 왔지. 당시 선물은 두꺼운 겨울 양말과 캔 음식이었어.”
■ “정전협정 다음날 중공군의 악수 제의 거부”
지금도 ‘가평대대’ 애칭 호주군 3대대 출신 모스 씨
6·25전쟁 기간 호주는 육군 3개 대대와 항공모함 2척을 포함한 해군 함정 11척, 3개 전투비행대대를 한국에 파견했다. 교체병력을 포함해 연인원 1만7000여 명을 보낸 호주군의 전사자는 339명에 이른다. 1950년 9월 한국에 도착해 유엔군의 북진 작전에 참가한 호주 육군은 사리원, 정주, 가평, 마량산 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쳤다. 특히 용맹을 떨친 호주군 3대대는 아직도 ‘가평대대’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시드니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휴양도시 어리나에서 만난 잭 케이시 씨(79)는 3대대 소속 병장으로 정주전투, 사리원전투를 치렀다. 산소 호흡기 없이는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노쇠했지만 60년 전의 기억은 또렷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형 두 명에 이어 한국으로 간다고 하니, 어머니는 ‘(총알을 맞지 않게) 머리를 들지 말라’고 하더군. 북한군과 처음 마주쳤을 때 겁이 나기도 하고 ‘내가 왜 여기에 있나’ 하는 생각도 했지.” 하지만 2004년 한국을 방문해 발전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케이시 씨는 “또다시 그런 전쟁이 벌어진대도 한국을 돕기 위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3대대 D중대 기관총 사수였던 피터 모스 씨(79)는 6·25전쟁 막바지의 치열했던 전투를 되살렸다. 1953년 7월 25일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27일 밤까지 중공군은 임진강 근처 후크고지를 지키던 호주군을 집중 공격했다. “중공군의 피리소리와 인해전술이 아직도 생생해. 27일 오후 10시 (정전협정 발효를 알리는) 초록색 신호탄이 하늘로 솟구친 뒤에야 모든 것이 끝났지.”
다음 날 아침 북한군과 중공군은 후크고지로 올라와 “전쟁이 끝났으니 악수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호주군 누구도 이들과 악수하지 않았다고 모스 씨는 강조했다. 호주군은 정전협정에 따라 후크고지를 북측에 넘겨주고 휴전선 밑으로 내려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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