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에게 겨울은 정말 가장 힘든 계절이다. 온몸을 찌르는 송곳 같은 추위 속에서도 지친 몸을 추스르고 꼭두새벽에 일어나 외곽근무를 나가야 한다. 반달곰과 살모사마저 달콤한 겨울잠을 자고 있을 때조차,
군인들은 깊은 산 속을 누비고 텐트를 치며 숙영을 한다. 나는 입대 전 중국 하얼빈에서 대학을 다녔다. 하얼빈은 한반도의 북단에 위치한 백두산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12시간을 달리면 나온다. 당연히
엄청나게 추운 곳이다. 하지만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우리나라 강원도에 비하면 그곳은 하와이라고. 초점 못 맞추는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넋나간 대사를 칠 수도 있겠다. 니가 가라, 하와이.....
내가 102 보충대에서 27사단 신병교육대로 배치받고 제일 먼저 받은 교육이 제설작업이었다. 아침부터
조교들이 신병들을 불러내서는 낯선 제설작업 도구들을 주면서 온천지를 덮은 눈을 치우라고 했다.
연병장, 영외도로, 대대 CP(본부)..... 종일 눈만 치웠다. 당시 설날을 낀 5주간의 훈련 기간 중 신병교육을 받는 대신 눈만 치운 날이 열흘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당시 조교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육생들! 훈련소에서 사격 잘하고, 각개전투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설작업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자대 가서 제설작업만 잘해도 고참들에게 인정 받고 사랑 받을 수 있습니다. 자대
가서 고생하지 말고 훈련소에 있을 때 제설작업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마스터하고 가도록 합니다.
알겠습니까아?”
제설작업? 그게 뭐라고 마스터까지 할 만한 스킬이 필요한가? 그냥 눈만 치우면 되는 거지. 그런데 이것은 경험 없는 신병의 오만하고 성급한 판단이었다. 사실 제설작업에는 왠만한 군생활의 작업 스킬이 다 포함되어 있다. 삽질, 비질, 곡팽이질, 단가(들것)질, 지구력, 눈치보기, 추위와의 싸움 등등 거의 모든
스킬이 녹아 있다.신교대에서 조교들에게 제설작업의 노하우를 미리 전수받은 나는 자대에서 고참들을 사랑을 받는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등병 때는 제설작업을 하는 날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힘든 아침구보도 뛰지 않고, 그냥 묵묵히 눈만 치우면 되니까 말이다. 고참들도 눈만 열심히
치우고 있는 후임들을 딱히 나쁘게 보지 않는다. 또한 고참들과 같이 눈을 퍼 옮기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질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진다. 물론 짬밥이 올라갈 수록 귀찮아지고 싫어졌지만
말이다.
자대 배치를 받고 며칠 후, 하늘에서는 위풍당당한 ‘악마의 똥가루’(강원도 산골에서 겨울 내내 눈을 치우다 보면 이 표현의 의미가 한층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가 내리기 시작했다. 불침번은 기상시간도 아닌데 소대원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기상하십시오, 기상하십시오! 금일 폭설로 인해 조기 기상입니다. 05시 30분까지 제설작업 도구 챙겨서 중대사열대로 집합하시랍니다.”
고참들은 저주받은 강원도를 들먹이며 투덜거렸고, 후임들은 잽싸게 중대 창고로 가서 제설도구를 챙겼다. 그리고 당직사관의 지휘를 받으며 소대별로 영외도로, 연병장, 대대주차장으로 흩어져서 제설작업을 시작했다. 연병장을 배정받은 우리 소대는 광활한 눈밭으로 작업도구를 들고 이동했다. 막내인 나는 신병교육대에서 배운 빛나는 삽질로 고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보란 듯이 녹색 눈삽을 들고 당당하게 삽집을 하려는 찰나, 박병장이 기가 막힌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야~ 우리 막내는 눈삽 들었네! 막내가 눈삽 들고 눈 퍼주면 우리는 포대에 눈 담아서 버리러 가면 되는구나. 막내님, 눈 퍼주세요~. 사랑하시는 만큼 왕창 퍼주세요!”
헉! 그랬다. 빛나는 눈삽은 빛나는 고참들의 전유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에 있던 일병들의 표독한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히고 있었다. 눈삽을 든 가녀린 내 두 손에서 자연 발화가 일어날 정도로 뜨거운 눈길이었다. 잽싸게 눈삽을 박병장에게 넘기고 쌀 포대를 들었다. 그날 저녁 창고 뒤에서, 나는 고참
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진정으로 알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너무 사랑받아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흑흑흑.....
아직 군대를 가지 않은 예비 군인을 위한 군생활의 지혜 하나. 짬밥이 모자랄 때는 살포시 포대나 단가를 들어야 한다. (단가는 들것을 의미하는 일본어 단까たんか에서 나온 말인데, 군대에서는 아직 그렇게 쓰고 있다. 나무 막대기 2개에 포대를 끼워서 만드는 들것이다. 단가의 위력은 덤프트럭을 능가한다. 못 옮기는게 없다.)
제설작업은 시간과 장소를 구애받지 않으며, 눈만 내리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상병 시절, 두 달 동안 화악산 중봉에 경계파견을 나간 적이 있다. 어린이날인 5월 5일, 1450미터 고지인 화악산에 미친 듯이 폭설이 내렸고, 우리 소대는 정상에서 중턱까지 내려오면서 미친 듯이 눈을 치웠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작업인가?'
많은 군인들은 볼멘 소리로 묻는다. 하루종일 치우고 나면, 다음날 더 많이 퍼붓고 다시 치우면 그 다음날 또 내린다. 끝없는 단순노동의 진수를 온몸으로 가르쳐 주는 제설작업. 왜 하는걸까?
원론적으로 따지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위협 속에서 보급로와 작전로를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났는데 눈 때문에 고립되면 곤란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문득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그럼 북한군은 제설작업 하면서 쳐들어오나?
날카로운 잔머리의 소유자인 가츠가 비장의 관심법으로 발견한 진실은, 연대장이나 대대장의 안전한 출근로 확보가 작업의 이유라는 것이다. 신과 동격인 연대장님이 출근하시는데 도로가 미끄럽다고 생각해 보라. 군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믿거나 말거나.
겨울 군번인 내 군생활의 시작과 끝은 제설작업으로 장식되었다. 전역 당일에도 어김없이 새벽에 눈이
내렸고, 건방진 당직병은 악마 같은 웃음을 날리며 내게 말했다.
“어이~, 가츠아저씨! 마지막으로 눈 한 번 쓸고 가야지? 이제 나가면 눈 쓸 일 있겠어? 눈만 보면 몸이
근질근질할 텐데, 킬킬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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