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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7> 뉴질랜드 사진兵렌즈에 담긴 6·25


휴가 가듯 참전한 ‘키위’들을 맞은 건 빗발치는 포탄이었다

외부에 대한 동경에서 지원
파병 5350명중 120명 사상
60년 전 참상 생생히 기록
“한국에도 널리 알려주오”



이언 매클리 씨(82). 뉴질랜드 군인들의 6·25전쟁 참전 역사를 추적하는 동안 공개된 여러 장소와 간행물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클랜드 시내 박물관의 6·25전쟁 홍보 코너와 웰링턴 시 외곽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육군 제16포병연대 본부의 해외참전기념관, 뉴질랜드 역사가 3명이 쓴 두꺼운 뉴질랜드 전쟁사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1950년 12월 22세의 나이로 한국에 왔던 매클리 씨는 16포병연대 소속 사진병이었다. 1952년 6월 귀국할 때까지 그는 참혹한 전쟁과 뉴질랜드 병사들의 활약상, 한국의 모습 등을 사진에 담아 본국에 알렸다. 당시 오클랜드위클리뉴스와 프리랜스 등 뉴질랜드 신문들이 거의 매주 두 페이지에 걸쳐 그의 사진을 소개했다. 그의 사진들은 60년이 지난 오늘도 뉴질랜드의 6·25전쟁 참전뿐 아니라 현대사의 증거물로 사용되고 있다.

오클랜드 박물관은 6·25전쟁 홍보 코너 내부에 “(6·25전쟁을 위해) 뉴질랜드를 출발했을 때, 우리는 굉장한 휴가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매클리 씨의 말을 소개하며 당시 아무런 준비 없이 지원병으로 전쟁에 따라 나섰던 ‘키위(뉴질랜드 사람의 애칭) 병사’들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전했다. 당시 뉴질랜드는 육군 제16포병연대와 해군 프리깃함 5척을 파견했다. 모두 5350명이 참전해 41명이 사망하고 79명이 부상했다.

지난달 26일 웰링턴 시내 재향군인회관에서 만난 매클리 씨는 60년 전 ‘휴가’를 떠날 때처럼 밝은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이어 그와 동료들이 찍은 낡은 흑백사진 30여 장을 내밀며 “한국에 가져가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사진들을 골라 달라고 했다. 그는 1951년 새로 받은 신형 카메라를 들고 북한 쪽 전방을 살피는 자신의 사진을 먼저 골랐다. 그는 “당시 뉴질랜드에서 기다리던 가족들이 내 사진을 받아보고는 몹시 안심했다”고 회고했다. 그러고는 사진들을 한참 들추다 한국인 아이를 찍은 사진을 뽑아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7, 8세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겨울 스웨터 차림에 베레모를 쓰고 사진을 찍는 매클리 씨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사진①). 매클리 씨는 “우리가 ‘킴(Kim)’이라고 불렀던 전쟁고아”라고 소개했다. 아이는 부대의 잡일을 하며 병사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당시 16포병연대 부대원들이 적진을 향해 포를 발사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을 골랐다(사진②). 이 사진은 이후 2달러짜리 뉴질랜드 우표에 사용됐다. 이 밖에도 매클리 씨는 뉴질랜드 병사들이 참전 후 처음으로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찍은 사진, 16포병연대 병사들이 유명한 ‘가평전투’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막아낸 뒤 사용한 포탄상자를 쌓아놓고 찍은 기념사진 등을 골라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매클리 씨는 60년 전 정말로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한국전쟁에 지원한 것은 외부 세계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남반구의 섬나라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외부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사진관에서 일했던 그는 18세 때 공군에 입대한 뒤 항공사진 등의 촬영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그 기술을 인정받아 6·25전쟁의 종군 사진병으로 발탁됐다.

그는 18개월 동안의 6·25전쟁 참전이 “위험했지만 굉장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한번은 부대 안에 중공군의 포탄이 떨어져 2명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파편은 그가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바로 옆 막사로 튀어 동료가 들고 있던 물통을 깨뜨렸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무사했다.

그는 “한국전쟁은 나의 모든 것”이라며 “참전은 많은 경험과 많은 친구를 내게 선물했다”고 말했다.

그는 종군 사진병으로서 업적을 인정받아 귀국 후 현지 신문에서 35년 동안 사진기자로 일했다. 1998년 은퇴한 뒤 한국전쟁참전용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글·사진 웰링턴·오클랜드=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2박3일 꼬박 1만발 발사… 중공군 4월 공세 저지”▼
■ 노병들이 전한 ‘가평전투’

한국군 갑작스러운 후퇴에
‘전방이 심상치 않다’ 술렁
잠은커녕 선채로 전투치러

1951년 4월 22일. 경기 가평군 일대에서 한국군 6사단을 지원하던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 소속 병사들은 3일 뒤로 다가온 앤잭데이(Anzac Day·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이 1915년 4월 25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기념일)를 기다리며 마음이 설렜다. 그러나 그날 밤 중공군은 유명한 ‘4월 공세’를 시작했고 뉴질랜드 포병들은 6·25전쟁 참전 후 가장 힘든 사흘을 보내야 했다.

지난달 26일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 시 재향군인회 사무실에서 만난 70, 80대 노(老) 포병들은 59년 전 서로의 기억을 함께 더듬으며 당시 ‘가평전투’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구성해냈다. 승전의 기쁨보다는 처절한 후퇴의 기억부터 터져 나왔다.

“22일 오후 9시 반쯤이었지. 일부 부대원이 ‘전방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며 술렁이기 시작했어. 그래서 저마다 황급히 짐을 싸서 명령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한국군이 우리 부대를 지나 후퇴하는 모습이 보였어. 무언가에 놀라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월리 울스텐홈 씨·84)

“그 이후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어. 한국군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전방에는 영국군과 캐나다군 등이 있었는데 우리 뉴질랜드 포병은 누구를 엄호 사격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당황했으니까.”(블루 린스키 씨·82)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유엔군 전선이 흐트러지자 후방을 지키던 뉴질랜드 포병들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밥 해먼드 씨(79)는 “후퇴하는 동안 유엔군 한 명이 중공군의 총에 맞았지만 아무도 그를 구할 수 없었고 보고도 그냥 지나가야 했다. 길에서 소를 잡아 허기를 채우다 중공군이 쫓아와 도망쳐야 했다”고 회고했다.

뉴질랜드 포병들은 몇 차례 정지와 후퇴를 반복하다 23일 저녁에야 경기 가평군 가평천 부근에 진지를 다시 구축했다. 이후 전방에서 중공군과 맞선 호주군과 캐나다군을 연달아 엄호하며 2박 3일 동안 1만여 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나와 동료들은 어떤 밭에 자리를 잡고 계속 포를 쏴댔지. 중공군이 언제 진격할지 몰랐고 포 소리가 커서 2박 3일 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음식도 먹을 수 없었고 포를 계속 쏴야 했기 때문에 내내 서 있을 수밖에 없었지.”(해먼드 씨)

뉴질랜드 포병들은 포신이 달아올라 페인트칠이 벗겨질 때까지 포를 쐈고 끝내 중공군의 추가 남하를 막아냈다. 해먼드 씨는 “중공군이 물러난 다음 그들이 머물렀던 진지에 가보니 우리 포탄을 피하느라 챙겨가지 못한 군수물자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뉴질랜드군의 전공을 치하해 표창을 수여했다. 이 표창은 현재 뉴질랜드 웰링턴 외곽에 있는 부대 본부에 보관돼 있다.


▼“어둠 틈타 압록강으로… 새벽 2시 신의주 향해 포격”▼
■ 참전용사회장 짐 뉴먼 씨

“위험지역 진격” 침묵속 항해

해군 취약한 北 대응 못해
뉴질랜드 한국전쟁참전용사회 회장인 짐 뉴먼 씨(77·사진)는 1951년 9월 무렵의 압록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해군으로 참전한 그는 뉴질랜드 해군 프리깃함 하웨를 타고 심야에 몰래 북상해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신의주 지역을 직접 포격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지난달 말 오클랜드 시에서 만난 뉴먼 씨는 “언론에는 처음 공개하는 것”이라며 당시 상황을 기록한 회고록을 건넸다.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요약 발췌했다.



“서해 지역을 지키던 하웨와 세인트브리지베이(영국 해군 소속)는 그날 오후 북쪽으로 향했다. 밤이 오자 해안선이 보이지 않았다. 선장 등 일부를 빼고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낮 동안 충분한 포탄이 지급됐고 포를 면밀히 점검했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일이 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선원들은 이른 저녁식사를 한 뒤 전투대형을 갖췄다. ‘위험지역’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고지됐다. 배는 불을 끄고 레이더를 이용해 항해했다. 배가 속력을 줄이자 멀지 않은 거리에 희미하게 육지가 보였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둠 속에서 125명의 선원들은 무거운 침묵을 지켜야 했다.

오후 11시경. 배는 압록강 어귀에 들어섰고 상류를 향해 9노트로 항해했다. 오전 2시가 되자 배가 갑자기 멈추더니 180도 회전했다. 이윽고 남쪽의 항구 쪽으로 총과 포의 사격이 시작됐다. 배 안의 모든 무기가 항구를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사격과 포격은 10∼15분 계속됐고 포신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어 우리는 강을 빠져나왔다. 북한 쪽에서는 우리를 향한 어떤 대응사격도 없었다. 우리는 북한 쪽의 피해상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북한은 스스로 (해군력 측면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생각해 볼 기회가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