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콘텐츠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6>佛노병 16명 “한국은 제2의 조국”


“佛혁명 가치 계승한 고귀한 전쟁… 참전 자체가 자랑스럽다”
1·4후퇴 직후 최전선 배치
3421명 참전 269명 사망-실종
“당시엔 한국의 미래에 회의적
지금의 발전상에 찬사 보낸다”

지난달 18일 정오 프랑스 파리 시내 샹드마르 광장 인근에 있는 한식당. 70대 후반, 80대 초반의 노인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양쪽 가슴엔 올리브 가지를 그려 넣은 유엔군 프랑스대대 배지, 그리고 태극기와 프랑스기가 교차한 기념 배지가 달려 있었다. 손에는 빛바랜 스크랩북과 낡은 사진첩이 쥐어져 있었다. 새로운 얼굴이 등장할 때마다 서로 양쪽 뺨을 맞대고 인사를 나눴다.

이들은 프랑스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모임인 한국전쟁참전용사회 회원. 한국의 동아일보에서 취재를 왔다는 얘기를 듣고 파리와 근교에 살고 있는 회원 30여 명 가운데 16명이 모인 것이다.

한 참전용사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이것 좀 봐, 우리가 부산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다룬 당시 신문 기사야”라며 누렇게 변색된 ‘프랑스수아’지를 펴 보였다. 앙드레 다샤리 씨(78)는 오래된 컬러 사진 10여 점을 자랑스레 테이블 위에 늘어놨다. “1951년 내가 찍은 한강과 용산, 남대문의 모습이야. 지금 서울은 마치 뉴욕 같지만 50여 년 전엔 시골 마을 같았다고.”

60년 전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청년이었던 이들에게 전쟁은 낯설지 않았다. 제1, 2차 세계대전의 무대였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전쟁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생 독립국 ‘코레(Cor´ee)’는 미지의 세계였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어. 군 복무 중이어서 지원했는데 한국이란 나라를 지도에서 처음 찾아봤지.” 앙리 라무슈 씨(82)의 말에 옆자리의 마르셀 브누아 씨(80)도 거들었다. “인도차이나전쟁을 다녀온 뒤였는데 친구들이 ‘한국은 인도차이나만큼 덥지는 않다’고 하더군. 내가 자원한 것은 그게 이유였어.”

프랑스대대는 마르세유 항을 출발한 지 36일 만인 1950년 11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해 1·4후퇴 다음 날인 1951년 1월 5일 전선에 배치됐다. 이후 지평리전투(1951년 2월 13∼15일), ‘단장의 능선’ 전투(1951년 9월 13일∼10월 13일), ‘화살머리 고지’ 전투(1952년 10월 6∼10일) 등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대부분 세계대전과 인도차이나전쟁을 겪은 베테랑들이었지만 혹독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세 차례 3개 대대를 교체하며 연인원 3421명이 참전한 프랑스군의 인명 피해는 전사 262명, 부상 1008명, 실종 7명이다. 참전용사의 3분의 1 이상이 사상자가 되거나 실종된 것이다. 세르주 아르샹보 씨(80)는 “1952년 2월 중공군의 포격을 받았을 때 바로 앞에 있던 동료는 로켓포를 허리에 맞아 몸이 두 동강 났고 바로 뒤에 있던 동료도 쓰러졌다. 포격이 끝난 뒤 온전한 사람은 나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낯선 한국 땅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용사들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자크 그리졸레 씨(80)가 시원스러운 답을 줬다.

“남쪽으로 향하는 끝없는 피란민의 행렬을 보면서 ‘과연 한국이란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지. 하지만 한국은 어느 나라도 부러워할 만큼 눈부시게 발전했어. 한국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

피에르 마비요 씨(82)는 “한국인들이 한국전쟁 이후 이뤄낸 모든 것에 찬사를 보낸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을 무한한 자랑으로 여긴다”며 “프랑스는 나의 조국, 한국은 두 번째 조국”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참전용사회의 현재 회원은 366명으로 직접 참전한 용사가 151명이고 나머지는 유족들이다. 프랑스에는 인도차이나전쟁, 알제리전쟁 등 참전자들이 많지만 참전용사회란 조직이 구성돼 있고, 정례적인 모임을 갖는 것은 한국전쟁참전용사회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자 스타니슬라스 살리츠 씨(79)는 “한국전쟁은 프랑스혁명 전사의 후손으로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운 고귀한 전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레지스탕스 영웅’ 3성 장군, 중령급 대대장 자원해 중공군 격파
몽클라르 장군 딸 회고록 집필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독 한국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를 해주셨죠. 한국인들은 매우 용감해 만약 프랑스가 위험에 처하면 한국에 지원을 요청하면 되겠다 싶을 만큼 훌륭한 군인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6·25전쟁 참전 프랑스군을 지휘한 랄프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엔 뒤푸르 씨(59)를 지난달 22일 파리에서 서쪽으로 20여 km 떨어진 작은 도시 르페크의 자택에서 만났다.

몽클라르 장군은 프랑스의 전쟁영웅이었다. 육군사관학교인 생시르 4학년 생도 시절인 1914년 소위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엔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나르비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본명은 라울 마그랭베르느레인데 나치 치하 레지스탕스 활동 때 암호명으로 쓰던 몽클라르로 개명했다.

1950년 8월 프랑스 정부가 미군 2사단 산하의 파견 부대 창설을 발표하자 3성(星) 장군이었던 몽클라르 장군(당시 58세)은 중령급인 지휘관을 지원했다. 상부에선 “장군이 어떻게 대대장을 맡느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유엔군의 한 사람으로서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몽클라르 장군이 72세 때인 1964년 각종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때 딸 뒤푸르 씨는 겨우 열 세 살이었다. 하지만 딸의 뇌리에 아버지는 평생 군인으로 깊이 각인돼 있다.

“아버지는 종종 ‘나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참전했다. 평화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한국전쟁은 반드시 참전했어야 했던 전쟁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정당한 명분을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그분의 인생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또 한국인들의 인내심을 높이 평가했어요. 아마도 한국인들이 36년이라는 긴 일제강점기를 이겨내고 독립을 쟁취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뒤푸르 씨는 최근 아버지의 일대기를 다룬 600여 쪽 분량 책의 집필을 마쳤다. 장군의 기고와 글, 편지, 딸에게 들려줬던 얘기들을 담았는데 특히 장군이 지휘했던 지평리 전투를 자세히 다뤘다. 당시 프랑스군은 중공군 3개 사단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으나 사흘간 전 장병이 철모를 벗어던지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채 백병전을 벌여 중공군을 격파했다. 유엔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다. 몽클라르 장군은 “‘베르됭전투’(제1차 세계대전 때 가장 치열했던 전투)와 비슷했다”고 회고하곤 했다.

뒤푸르 씨는 6·25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한국의 발전과 평화는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어진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를 기억해주세요.”


▼ “전우 강호근 씨를 찾습니다” 철원 정찰부대 근무 브뢰유 씨 회고 ▼

1952년 프랑스 정찰부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로베르 브뢰유 씨(80)는 당시 정찰부대에서 함께 생활했던 강호근 씨를 찾을 길이 없겠느냐고 기자에게 부탁했다. 브뢰유 씨는 “강 씨는 당시 22세였으며 틈틈이 책을 읽던 문학청년이었다. M1카빈 소총을 다뤘다”고 기억했다.

브뢰유 씨는 1952년 10월 6∼10일 강원 철원 서북방 15km 지점 화살머리(Arrowhead) 고지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을 기록한 글을 보내왔다.

“10월 6일, 달도 없는 고요한 밤. 연발포탄이 비처럼 우리 진지에 쏟아졌다. 폭격은 며칠이나 계속됐다. 우리는 겨우 수백 명이었고, 그들(중공군)은 수천 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 명령을 받았다. 중공군의 서울 진격로를 차단하라는 의미였다. 선발대는 거의 전멸했다. 탄약이 떨어져 칼과 괭이로 유격전을 벌였다. 10월 10일, 우리 측 공군이 중공군 진지를 폭격했다.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서울을 지켜낼 수 있었다.”


▼ “美폭격기가 드럼치듯 폭탄 쏟아붓고
흰옷 입은 인파 ‘하얀 강’ 이뤄 南으로” ▼
헝가리 종군기자 메러이씨 증언


헝가리 공산당 기관지 ‘사바드 네프(자유인)’의 기자였던 티보르 메러이 씨(86·사진)는 1951년 8월 14일 개성에 도착했다. 6·25전쟁 휴전협상을 취재하라는 지시였다. 메러이 씨는 지난달 1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 2주면 체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협상은 더뎠다”고 회고했다. 그가 주로 머물던 평양에는 끊임없이 미군 폭격기가 나타났다. “당시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한국말은 ‘뱅기(비행기)’였다. 드럼을 치듯 한바탕 폭탄을 쏟아 붓고 나면 거리엔 시체가 즐비했다. 매일 흰 옷 입은 사람들이 ‘하얀 강’을 이뤄 남쪽으로 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매일 이어지는 폭격과 시가전, 즐비하게 쌓이는 시신들을 목격했지만 6·25는 더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는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이, 자신들이 전혀 원치 않은 전쟁을 하면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서로 죽고 죽이는, 유례가 없는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메러이 씨는 1956년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파리로 이주했다.

글·사진 파리·르페크=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