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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생활 백서-수통 원정대


어느새 일병 진급을 한 달 앞두게 된 가츠는 노련한 이등병 말년이 되었다. 소대에는 네 명의 후임이 있었고 그 중 한 명이 나와 같은 분대였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한 윤이병이다. 이 녀석은 내 군생활에 청량제 같은 존재였다. 먼 훗날 윤이병은 소대 내에서 가장 무서운, 정확히 말하면 ‘기피하는’ 고참으로 거듭나게 되지만 당시에는 우리 소대장이 특히 걱정하던 막내 이등병이었다. 항상 표정이 어둡고 말이 없는데다 뭔가 주눅들어 있었다.
우리 소대 고참들은 윤이병을 진심으로 걱정했고 전역을 한 달 앞둔 소대장마저도 그를 항상 예의주시했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반전을 능가하는 그의 연기력에 훗날 나는 진심으로 감동받았다. 작은 체구에 뽀얀 피부와 귀여운 외모를 가진 그 녀석이 악마였다니 말이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었다. 윤이병과 마주치는 모든 고참들의 첫 마디는 한결같았다.
“윤상혁이!”
“이병 윤상혁! 네!”
“표정 좀 밝게 하고 있어라. 내가 다 불안하네.”

우리 중대는 교육훈련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금요일 저녁에는 부대 앞산에서 6중대와 교대로 야간공격과 야간방어 훈련을 하고 있었다. 부대 앞산이라고는 하지만 명색이 강원도 산답게 가장 높은 고지의 높이가 896미터나 되었다. 이 년 동안 군생활 하면서도 밟아보지 못한 미지의 구역이 있을 만큼 깊기도 했다. 
그날의 훈련을 종료하면서 우리 중대는 마무리를 하느라 다들 분주했다. 이제 내려가서 씻고 잠들면 황금 같은 주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여느 때보다 마음이 가벼웠다.
“각 분대별로 인원, 장비 파악해라.”
이 대사는 훈련이나 교육 중에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다. 소대장의 명령을 받은 분대장은 분대원에게 확인을 지시한다.
“3번 소총수 가츠, 장비 이상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줄줄이 분대장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다. 분대장은 소대장에게 보고하고 소대장은 중대장에게 보고한다. 이런 확인을 시도 때도 없이 한다. 훈련 중에는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한다. 그만큼 인원과 장비가 중요한 것이다.
당시 윤이병은 8번 기총부사수였다. 이 녀석 차례인데 아무 말도 없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대장인 박병장이 재차 물었다.
“야 윤이병, 보고 안 해?”
“8번 기총부사수, 어, 어, 이상하다... 수통이 없습니다!”
결국 이 녀석이 한 건 하는구나! 설마 고의로 그걸 버린 것은 아니겠지? 온갖 의혹이 피어올랐다. 하긴 그래 봤자 자기만 손해인데 일부러 버릴 리는 만무했다. 어쨌건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군대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이 보급품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어찌 보면 군인도 보급품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탈영하면 열심히 다시 찾아서 데려오는 것 아닐까?) 따라서 윤이병이 잃어버린 수통도 어떻게든 찾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짬밥이 되는 병사들도 보급품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주로 이등병들이 자주 잃어버렸다. 그만큼 정신이 없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 부대 후임들의 보급품 상태는 최악이었다. 대개 수통을 수통피에 넣어서 똑딱이 단추로 잠그는데 후임들의 수통피는 열이면 아홉, 똑딱이 단추 하나가 고장난 상태였다. 심하면 양쪽 다 고장난 것도 있었다. 그러니 야간에 산 속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수통이 떨어지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손으로 틈틈이 확인하면서 신경을 써야 하는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윤이병이 수통을 잃어버린 것이다.
모든 훈련을 마치고 주둔지로 복귀만 하면 되는데 어두컴컴한 산 속에서 다시 수통 찾을 생각을 하니 막막해졌다. 분대장은 소대장에게 보고했고 소대장은 노발대발했지만 잃어버린 녀석이 윤이병이라서 차마 화도 내지 못하고 참고 있었다. 이럴 때는 관심병사인 것도 괜찮은 거 같다. 나였다면 아마 개갈굼 먹었을 텐데 말이다. 생각할수록 윤이병의 가증스러운 관심병사 연기에 아직도 치가 떨린다.
“지금은 어둡고 늦었으니 일단 철수하고, 1분대는 주말에 종교행사 갔다와서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찾으려면 지금 찾지... 하긴 그 밤에는 절대 못 찾겠지만 말이다. 그럼 포기해야지 쉬는 주말에 나와서 찾으라니. 그깟 수통 하나 때문에 여러 명이 주말을 반납하고 개고생해야 되는 건가?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사실 수통 따위는 중대 비밀창고를 까보면 수십 개가 쳐박혀 있었다. 하지만 매번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보급품을 잃어버려도 된다는 식으로 병사들의 마인드가 느슨해질 우려가 있는데다, 문제가 있어 보였던 윤이병의 정신세계를 좀 더 타이트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소대장의 배려도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시범케이스라고 보면 되겠다. 군대에선 뭐라도 잃어버리면 이렇게 된다.
침울한 분위기로 소대에 복귀한 우리 분대원들은 윤이병을 붙잡고 잃어버린 곳을 빨리 기억해내라고 추궁했다.
“야, 마지막으로 확인한 곳이 어디야?”
“이병 윤상혁! 그게 312고지에서 562고지로 가는 중에 잃어버린 거 같습니다.”

“아이고 두야! 그 깊은 산 속에서 그걸 우째 찾노? 이걸 갈아마셔버릴 수도 없고. 아, 인기가요 봐야 되는데. 쥬얼리 누나들 <슈퍼스타> 부르는데. 털기춤 봐야 되는데. 아, 흑흑흑.”
아무리 군대라도 별다른 작업이 없는 주말에는 TV 앞에 앉아서 예쁜 누나들 보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강호동의 <천생연분>을 비롯한 온갖 짝짓기 프로가 대세였고 평일에 못 본 드라마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TV를 못 본다고 투덜거리던 박병장은 갑자기 토요일 당직을 맡게 되어 일요일에는 근무취침을 보장받았다. 뭔가 미심쩍었다. 물론 토요일 당직은 모두 피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일요일에 산 속을 누비며 수통 찾는 것만큼이나 싫을까? 결국 우리의 박병장은 수통 찾기 멤버에서 제외되었고 군종병인 김일병도 당연히 열외가 되었다. 결국 이상병과 심일병, 나, 윤이병뿐이었다. 우리 분대장 대신 우리를 인솔할 사람이 필요했다. 타 분대장들은 각자 자기 분대원들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에 결국 당시 영내 대기 중이던 초임하사인 황하사와 같이 가기로 했다. 그는 타 부대 병사 출신의 부사관이었다. 황하사를 포함한 우리 5인의 원정대는 주말 오후 황금 같은 휴식시간을 뒤로 하고 부대 앞산으로 잃어버린 수통을 찾아 떠났다.

6월의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우리 원정대는 위병소를 나섰다.
“5중대 황인호 하사 외 4명,  562고지에 수통 찾으러 간다!”
위병소 아저씨는 흠칫 놀라더니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참 나, 황금 같은 주말 오후에 위병소 근무 서는 가련한 아저씨가 오히려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 정말 무모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영외도로에서 562고지를 바라보니 그냥 가슴이 답답해질 뿐이었다. 황하사는 윤이병에게 정확히 위치를 물었다.
“야, 너 어디서 잃어버렸어? 주말에 너 때문에 무슨 개고생이야?”
“이병 윤상혁, 죄송합니다! 312고지에서 562고지로 가는 도중에 잃어버린 거 같습니다.”
“에라이, 그걸 어떻게 찾어?”

우리는 산으로 올라갔다. 푹푹 찌는 날씨에 산을 타니 온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코감기 증상까지 있어서 죽을 맛이었다. 올라가는 도중에 코가 막혀서 계속 입으로 숨을 쉬었다. 그러자 갑자기 황하사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야, 가츠 이 색히. 이거 깔짝 올라가는데 헉헉거리고 있어. 암튼 요즘 애들은 겁나 나약해빠져 가지고, 쯧쯧.”
“이병 가츠, 죄송합니다!”
곧 312고지에 도착했고 잠시쉬면서 수색방향을 정하기로 했다. 심일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562고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또 황하사가 외쳤다.
“야 가츠! 죽을래? 이등병 색히가 어디 짝다리 짚고 서있어? 3소대 개판이구만! 야, 이상병! 니네는 애들 이딴 식으로 관리하냐? 야, 엎드려!”
짝다리는 개뿔. 그냥 서있었는데... 저 인간, 완전 표적수사의 달인이다. 군대가 아니라 검찰에서 일하면 더 성공할 수 있겠다. 이거 왠지 잘못 걸린 거 같다. 나는 312고지 정상에서 쌩뚱맞게 엎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데... 두고 봐라, 이 치욕 기필코 갚고 말겠다! 얼마나 엎드렸을까? 다시 출발했다. 심일병은 나를 다독거려 주었고 윤이병은 미안한지 연신 나만 쳐다보았다. 난 쿨하게 괜찮다며, 빨리 찾아서 내려가자고 했다. 이 녀석, 감동 받았나보다. 나만 졸졸 따라온다.
“야, 니가 앞장서야지. 이 멍청아!”
이래 가지고 오늘 내로 찾을 수 있을까? 훈련을 시작했던 지점부터 모두 흩어져서 수통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나 찾았을까? 도통 보이지 않는다. 벌써 562고지까지 두 번은 넘게 왕복했다. 정녕 수통 하나 때문에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 걸까? 문득 처량해진다. 옆에서 계속 투덜거리고 있는 황하사를 보니 약도 올랐다.
‘그냥 저기 절벽 올라갈 때 옆에서 살짝 밀어버릴까? 아무도 모를 거야. 단순사고로 위장하면 돼. 그래도 황하사는 순직으로 처리되어 국가유공자는 될 테니 날 원망하진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찰나, 황하사와 눈이 딱 마주쳤다. 헉! 나는 속도가 업 된 저글링처럼 다시 바닥을 파헤치며 열심히 수통을 찾기 시작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태양은 더 뜨거워졌다. 앞쪽에서 이상병이 뭔가를 발견한 듯 땅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어어, 여기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주위에 있던 우리는 환호하면서 이상병에게로 달려갔다. 역시 짬밥은 무시하면 안 되는 거야!
“이상병님이 찾을 줄 알았어요. 인기가요 보러 가자구요.”
근데 이건 뭥미? 땅 속에서 나온 건 6.25 때나 사용했을 법한 철모가 아닌가? 안그래도 요즘 유해발굴 사업이 한창이던데, 이러다가 우리가 유해발굴 하는 거 아냐? 소대장님의 깊으신 뜻은 바로 이거였나? 수통을 핑계삼아 유해를 찾으라는 것인가?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312고지로 되돌아갔다. 다시 원점이다. 정말 이러다가는 부대로 영영 못 돌아갈 것만 같았다. 황하사는 이제 대놓고 우리 귀여운 윤이병을 갈구기 시작한다. 사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지만 황하사에게 갈굼 먹고 있는 윤이병을 보니 측은했다. 안 그래도 소심하고 조용한 녀석이라 소대장을 비롯한 고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있는 녀석인데 말이다.
‘조금만 참아라, 윤이병. 형이 기필코 찾아주마!’

다시 562고지로 올라가면서 수색을 했다. 문득, 11시 방향 계곡 저 아래 조금 우묵한 곳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사실 몇 번의 수색에도 그냥 지나쳤던 곳이었다. 그렇게 깊은 곳에 떨어질 리는 없다고 다들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찾아볼 만한 곳은 다 찾아보지 않았는가? 속는 셈 치고 한 번 내려가보기로 했다. 나무를 붙잡고 내려가는데 작년에 떨어진 낙엽들로 바닥이 푹신푹신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전방에 무언가 반짝반짝하는 것이 보였다. 뚜뚜뚜뚜뚜...... 두둥!
거짓말처럼 그 곳에 윤이병의 수통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차... 찾았다! 우하하하!”
백 년 묵은 산삼을 발견해도 이보다 기쁠 수 있을까? 나는 수통을 손에 들고 윤이병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녀석에게 수통을 건네면서 말했다.
“야 임마, 형이 찾아준다고 했지? 하하하.”
“이병 윤상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흑흑흑.....”
그때 그 녀석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에서 내려갈 수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윤이병은 나를 절대적으로 따랐고 나 또한 그 녀석에게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끼고 귀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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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년 2개월 후. 오랜 세월 타도 황하사의 구호를 속으로만 삭이던 가츠군은 ‘계급이 깡패’라는 넘사벽에 막혀 구체적인 액션을 취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치 않았는지 황하사가 각종 사고를 저질러 옆 중대로 보직이동을 당했다. 우후훗! 내 손으로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타도했다.
어엿한 분대장이 된 나는 막내 김이병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분대장님, 죄송합니다. 소총 가스조절기가 없어요. 잃어버렸나 봐요. 흑흑, 죽여주세요!”
“아아아아아! 야, 너 소대장님한테 보고 안 했지? 아무도 모르지? 닥치고 가만히 있어. 형이 구해올 테니.”

문득 작년의 수통 사건이 떠올랐다. 잽싸게 행정반으로 가서 병기계원이었던 동기 녀석한테 가스조절기를 하나 부탁했고, 곧 신상 가스조절기를 받아서 내무반으로 돌아갔다. 한데 침상 저편에서 이제는 부분대장이 된 윤이병(아니, 윤병장)이 김이병을 붙잡고 상담을 하고 있었다. 야, 윤상혁. 염치가 좀 있어라. 네가 그런 일로 애들 갈굴 입장이냐? 옛날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잘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눈을 떴는데 내 옆자리에 누워 있어야 할 김이병이 없다! 이 자식 충격 먹고 탈영한 거 아냐? 깜짝 놀라 일어나보니 반대편 윤병장 자리 옆에 김이병이 나란히 누워 상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랬다. 윤병장은 그때까지도 김이병을 붙잡고 정신교육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헛기침 소리로 김이병을 잠시 구원해주고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는데 서늘한 바람 한 자락이 회한처럼 뒷덜미를 스쳐갔다. 

아! 내가 정녕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