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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손녀, 최초의 부녀(父女) 국회의원 김을동 의원!

장군의 손녀, 최  장군의 손녀, 최초의 부녀(父女) 국회의원 김을동 의원!

 8월 15일은 일제 35년의 치욕을 딛고 광복을 맞이한 날이자,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로 각각 올해 68·65주년이 되었다. 광복과 건국 모두 큰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특히 1945년 광복은 온 국민이 하나 되어 일궈낸 값진 승리의 날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에게 우리의 통치권을 강제로 빼앗기고 국민들은 모진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선조들은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포기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그 가운데 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역할 또한 매우 컸다.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로도 정평이 나 있는 백야 김좌진 장군.

  8월 1일 <육군>지에서는 김좌진 장군의 손녀인 김을동 국회의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구국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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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홍보과장(이하 육군)  바쁘신 중에도 불구하고 월간 <육군>을 위해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달에『항일투쟁 중국 참배단』과 청산리 역사 대장정에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목적으로 진행된 행사입니까?

김을동 의원(이하 김 의원)

청산리 항일역사대장정은 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대학생들이 북만주의 항일독립투쟁 전적지 및 발해․고구려 유적지 등을 돌아보며 민족성과 역사성을 고취하는 사업으로, 2001년부터 매해 진행되어 온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항일역사탐방 프로그램입니다. 

올해로 12회를 맞이한 ‘청산리 항일역사대장정’에 참가한 청년대원들은 독립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유적 현장들을 직접 체험하고 접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그들의 혼과 정신을 가슴 속 깊이 새겨 앞으로 동북아시대를 이끌어 나갈 주역이 되는데 필요한 청년정신을 함양해왔습니다. 또한, 대학생 팀과 별도로 4박 5일 일정으로 국회의원 및 사회지도층의 항일역사탐방도 5회째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독립군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쳤던 항일무장투쟁의 전적지인 역사의 한복판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가야할 젊은 대학생들과 현재의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국회의원 및 사회지도층들이 함께 만나는 것만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이러한 기회를 많이 만들어 사회지도층들의 역사인식을 바로잡고 민족정기를 세우는 데에 미력이나마 일조하고 싶습니다.


육군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에 위치한 김좌진장군기념관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건립 초기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다고 알고 있는데 어떠셨는지요?

김 의원  중국 흑룡강성 산시에 가면 제 할아버지 김좌진 장군님의 생가지이자 순국지가 있습니다. 처음 그 생가를 가보고 얼마나 가슴이 무너져 내렸는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우리 손이 닿지 않는 중국 땅이다 보니 무엇 하나도 제대로 보존된 것이 없었습니다. 생가를 보존하고, 할아버지께서 항일투쟁을 하시며 활동하셨던 곳에 백야 김좌진장군 기념관이자 해외현충시설물인 <한중우의공원>을 만들어 역사를 이어가리라 결심하고, 2000년도 초부터 중국에 이 공사를 시작했는데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사기도 당할 뻔 하고 기념관 건립을 위해 재산을 거의 다 쏟아 붓고 한 푼도 없었거든요. 남의 도움 없이 일을 꾸려가다 보니까 65평 강남 압구정동 아파트가 날아가고, 전세에서 다시 100만원짜리 월세로까지 주저앉게 됐지요.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마침 아들이 스타가 되어 그 출연료를 내어 놓았습니다. 그 이후 마음을 같이 하시는 분들이 십시일반 모아주셨지만, 자금부족으로 그리고 중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 공사가 중단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들었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그 고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지인 분 중에 누구는 이런 말까지 합니다. 

“김을동이 무지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훌륭한 기념관은 만들어질 수가 없다”고요. 저는요, 제 아들 일국이와 제가 김좌진 할아버지의 유족이고, 또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웬만한 관심으로서는 아무도 이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봐요. 물론 남자보다 더한 뚝심과 밀어붙이기로 이 일을 중국 땅에서 이루어냈으니 ‘무지하다’는 소리까지 들었던 거겠죠. 하지만 지금은 한중우의공원에 연간 수천 명의 한국인이 다녀가곤 하는데요, 한 가지 소망이 더 있다면 더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고 이용하도록 하여 독립정신을 배우고 선열들의 구국충정을 느끼며, 애국정신 함양을 위한 좋은 기회를 많이 만들어 드리고 싶은 것이 제 남은 소망입니다.

 

육군  아드님이 해마다 대학생들과 함께 청산리 항일역사대장정을 진행하고 있고 올해로 벌써 12회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실재하고 있는 유적지를 탐방하는 게 매우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학생들의 반응과 그동안의 성과는 어떠했나요?

김 의원  중국 동북3성의 북만주일대 1만리에 걸친 항일독립투쟁 전적지 및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실재하고 있는 고구려․발해 유적지를 직접 찾아가는 역사탐방으로서 생생한 역사 체험, 진취적인 도전정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뜨거운 기상을 느낄 수 있는 장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여름에 떠나는 대학생 팀은 송일국이 단장을 맡아 10박11일간의 대장정을 함께 꾸려 가는데, 점차 옅어진다고 우려하는 역사의식과는 달리 대학생들의 지원경쟁률이 대단합니다. 그만큼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대한민국이 뜨겁고 뭉클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합니다. 육군 예비 장교들도 참여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육군  역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육군에서도 장병 역사 및 나라사랑 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는데요, 청산리 항일역사대장정 이외에 혹시 다른 프로젝트가 있는지요?

김 의원  ‘일제만행 및 위안부 강제동원 사진전시회 세계순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은 올해 예산 85억원을 책정하여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전 세계 일본 재외공관을 통하여 홍보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단 한 푼의 예산도 책정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제가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회운영위원회 상임위 질의에서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안타깝게도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진전을 통해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널리 알리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역사왜곡과 독도 망언을 일삼고 있는 일본이 과거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일제만행 사진전시회의 주요내용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군국주의 부활의 망령을 일삼고 있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일제침략 만행과 태평양전쟁 시 주변국가에 저지른 참혹한 만행 및 위안부 강제동원, 태평양전쟁 강제징용, 강제징병과 관련한 사진전시회를 올 하반기 국회에서 ‘일제만행 사진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주한 일본대사관, 태평양전쟁 동아시아 피해국가의 대한민국 재외공관을 통해 전시할 계획이며, 향후 대한민국의 전 세계 재외공관을 통한 사진전시회 세계 순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진전과 연계하여 독도의 역사적 근거와 고문서·고지도의 자료전시로 독도가 명실 공히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세계에 알리고 일본이 과거 침략의 연장선에서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부당하게 우기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릴 계획입니다.


육군  초·중·고교의 역사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원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바람직한 역사교육과 국민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는 좋은 방안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김의원  이 역사교육과 관련해서는 지난 18대에서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관련 법안도 여러 건 발의하였고, 19대에서는 모든 교육 관련법의 모법인 ‘교육기본법’에 모든 교과과정에 역사교육을 필수로 하자는 개정안을 대표발의 했습니다.

역사는 민족의 혼입니다. 최근 서울대에서 24년 만에 역사과목 교양필수로 지정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고, 각계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비롯한 국민여론 또한, 한국사를 필수로 교육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개진하면서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다시금 집중 논의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서울대뿐만 아니라, 국내의 모든 대학에서 역사과목을 필수 교양과목으로 선정하도록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국가가 귀속한 것에 대해 재판부가 잘못 판단을 내려 재산을 다시 그 후손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 특별법’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하여 본회의에서 의결을 걸쳐 공포되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어제(2013.07.31.), ‘친일반역자 이해승 후손 이우영의 친일재산환수법 개정법률 위헌제청이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에 따라 각하 되었습니다. 이에 잔여 친일재판은 국가의 승기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같은 노력들이 제가 의정활동에 가장 중심을 두고 있는 바른 역사의식 고취와 민족정기 선양을 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육군  김좌진 장군님은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평생을 오로지 구국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흉탄에 4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셨는데, 많이 알려져 있지만,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회장으로서 할아버님의 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말씀과 특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 있으시면 <육군>지 애독자들을 위해 특별히 한 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김 의원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할아버지는 한말 기호흥학회와 호명학교를 설립해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며 국권회복에 힘쓰셨습니다. 경술국치 이후 만주에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다 2년여의 옥고를 치렀으며, 1917년 대한광복회 부사령으로 활동하셨죠. 또한 만주에서 대한독립의군부 활동을 하면서 1919년 만주·노령지역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에 동참을 하셨습니다.

3·1운동 이후 할아버지는 길림군정사를 거쳐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사령관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셨는데, 특히 1920년 10월에는 일제의 간도출병을 저지한 청산리대첩이라는 독립군전사에 빛나는 역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이후,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을 겪었으나 만주로 돌아와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해 독립군 조직을 정비하셨습니다.

1929년에는 무장투쟁의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으며, 재만 한인동포사회에 뿌리박은 항일무장투쟁을 계획하다 1930년 1월 24일 북만주 해림시 산시역 부근의 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한 청년회원이 쏜 총탄을 맞고 순국하셨고, 이에 정부는 할아버지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할아버지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하나 소개해 드리자면,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려면 우선 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친일 행위로 돈을 긁어모은 갑부들의 재산을 환수하기로 하고,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 사는 김종근이라는 굉장한 갑부를 찾아갔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당신은 나라가 망했는데도 보고만 있을 작정이오? 나라를 되찾는 일에 협조해 주시오." 라고 하자, 김종근은 "나라를 찾는 것은 좋은 일이나 지금 나에게는 돈이 없소.”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울컥 화가 치밀었는데, 김종근이 힘없는 백성들의 땅과 곡식을 빼앗고, 일본에 아부하여 벼슬을 사서 돈을 모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할아버지께서 재차 "당신도 대구 부자 장승원과 같은 꼴을 당하고 싶소?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오. 우리는 지금 당신에게 애국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오.”라고 말하자 그는 "아, 내놓겠소. 그러나 지금은 돈이 없으니 내일 오시오. 내 마련해 놓으리다."라고 하였답니다. 

김종근은 할아버지의 서슬 퍼런 행동에 기가 질렸던 거죠. 하지만 친일파였던 그는 그 와중에도 수작을 부렸다고 합니다. 다음날 김종근을 찾아간 할아버지는 그곳에 숨어 기다리고 있던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김종근이 일본 경찰에 밀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하하하 묶지 않아도 된다. 내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을 터이니 염려 말아라. 그리고 너 김종근 이놈! 2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천벌이 내릴 터이니 명심해라!"라고 당당히 말했고, 일본 경찰은 김좌진의 몸을 포승줄로 꽁꽁 묶었습니다. 이에 할아버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양팔에 힘을 불끈 주어 포승줄을 단번에 끊으며, “이까짓 포승줄로 날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 너희들이 가자는 곳으로 내 발로 가 줄 터이니!" 라고 말하며 일본 경찰들이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뚜벅뚜벅 걸어서 경찰서까지 갔다고 합니다.


육군  의원님의 어린 시절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할머니나 어머니 또는 친지들에게 전해들은 김좌진 장군님의 평소 가정에서의 모습은 어떠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너무 바쁘셔서 별로 가정적이시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웃음)

김 의원  충청도 홍성의 대부호셨던 할아버지는 16세의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재산을 노비들에게 나눠주고, 해방시켜 줍니다. 어려서부터 ‘계몽사상’을 공부하셨던 할아버지는 그때 이미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하셨던 거죠. 

그리고는 상경하셔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여의 옥고를 치르시고, 중국으로 망명해서 순국하실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탓에 아들인 저희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거지생활을 하시는 등 어렵게 자랐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중에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하셨지만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김두한 전 의원) 역시 가족들에게 남겨두신 재산은 한 푼도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나 워낙에 가족보단 남을 먼저 생각하시고 베푸는 걸 좋아하신 분들이셨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던 셈이죠.

두 분 다 가정적인 남자와는 거리가 먼 분들입니다. 아마 자신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제가 지금 이 자리,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의 자리에 있게 되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육군  국민과 국가를 위해 일하시는 의원님의 나라사랑 마음은 좀 더 특별할 것 같습니다. 할아버님과 아버님의 영향(?)도 있으실테고... 의원님의 국가관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김 의원  저는 모두 아시다시피, 백야 김좌진 장군의 손녀, 김두한 의원의 딸입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은 선대부터 내려온 과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국가관이나 정치인으로서의 모든 목표와 비전은 거기에 있습니다. 

첫째는 보다 강한 대한민국으로 거듭나 위한 국민들의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것. 둘째는 사회에서 소회되기 쉬운 약자, 특히 문화 복지의 약자와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가 사회적 약자가 된 분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것. 셋째는 대한민국이 21세기 문화선진국으로 도양하기 위해 한류문화를 적극 지원 육성하는 것. 넷째는 사회적 부가가치 및 잉여자산, 개인의 재능이 보다 원활하게 순환하여 전체적인 사회 균형, 복지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대한민국이 치욕스러운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역사의식이 살아있는 나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온갖 어려움과 수난에서도 굴하지 않고 버텨온 강인한 민족혼으로 온 국민이 화합하고 단결한다면 세계일류국가의 꿈은 빠른 시일 내에 실현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발현될 민족정신과 도전, 창조 정신은 백범 김구 선생이 말씀하시던 ‘문화선진국’으로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세계일류국가 대한민국, 문화선진국 대한민국을 이룩하는 데 미력이나마 온 힘을 쏟는 것이 저의 국가관이자 정치인으로서의 비전과 목표입니다.


육군  60년 넘게 변하지 않는 한반도의 안보상황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 또 의원님의 안보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 의원  1953년 7월 27일 서명된 이후 정전협정은 긴장관계가 반복되는 와중에도 한반도에 평화와 안보를 지켜주는 법적인 근거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의 상황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고 영구적인 평화는 멀게만 느껴집니다.

북한의 핵무기 및 운반수단 개발은 국제사회의 우려를 사고 있으며, 실수로든 계산착오로든 한반도에서 분쟁(conflagration)이 발생할 위험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나라를 잃었을 때 나라를 되찾기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들! 나라가 위기에 닥쳤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들의 나라를 보전하기 위한 숭고한 뜻을 우리는 부국강병으로 이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GDP의 2.5%만을 국방비로 지출하고 있습니다. GDP 대비 국방비의 비중이 세계의 평균수준(3%)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유일의 분단국가이고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미국은 4.1%, 중국은 4.3%, 러시아는 3.9%이며, 우리와 안보환경이 비슷한 이스라엘은 7.3%입니다. 심지어 중립국인 싱가포르도 4.9%입니다. 북한은 GDP의 무려 25%를 국방비로 사용하며 지속적으로 선군정치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국방비가 현실화 되어야 하며, 적정 수준의 국방비는 절대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육군  잠시 화두를 바꿔서... 의원님은 1967년에 성우로 데뷔하셨고, 2008년까지 영화, 드라마 등 많은 작품활동을 하셨는데, 정치를 하시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으신지요?

김 의원  정치인의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사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에게 남겨진 가난을 극복하는 것과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걷는 것이 당시 저의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대의 위업을 받들어 국가에 봉사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날의 기억이 제가 정치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육군  혹시 정계에 입문하신 것에 아버님의 영향도 있으셨는지요? 2003년 모 일간지 기사를 보니 아버님께서 역대 가장 훌륭한 국회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셨는데, 김두한 의원님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 의원  아버지는 몇 년 만에 집에 들어와서도 아침에 나갔다 점심 먹으러 들어오는 사람처럼 "여보, 나 왔소!"하며 큰 소리 치시면서 동지들을 거느리고 들어오시곤 했어요. 얼마나 밉고 서운했는지...

아버지는 항상 가족은 맨 나중이었어요. 그 탓에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나머지 가족의 생계를 어렵게 이으셨습니다. 게다가 가족보다는 동료들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뭔가를 내 것으로 소유하겠다는 욕심이 없어서인지 집 세간이 제대로 짝이 맞는 것이 없었습니다. 거울도 서랍장도 문짝도 뭐든 두개가 있는 것은 그 중 하나만 남기고 다 나눠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자식된 입장에서 얼마나 아버지가 미웠겠습니까? 그렇다고 자주 보고 응석을 부릴 수가 있나... 원망스러웠죠. 

철이 좀 들고 나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더라고요. 나중에 정말로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오랜 세월 쌓여온 원망 때문이었는지 실감이 잘 안 났습니다. 그런데 발인하는 날 아버지 상여가 나가는데, 집근처 고아원에 살던 50여명의 아이들이 노제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집에는 돈 한 푼 안 가져오시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유족연금을 그 고아원에 전부 기부하셨더라고요. 그 고아들은 제 아버지가 자신들의 아버지였던 거죠. 그 모습을 보고 그때서야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습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가족들보다도 생판 모르는 아이들에게 더 호의를 베푼 아버지가 참 야속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게 만들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죄송함 등등 여러 가지 감정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이제 저도 아버지의 나이가 되다 보니, 100%는 아니지만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립투사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서 고아가 되어 다리 밑을 전전하며 살게된 것이 아버지의 뜻도 아닐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이사람 저사람 와서 툭툭 치고 하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방어를 하기 위해서라도 싸움기술을 터득했어야 할 것이고, 제대로 된 교육이나 가족의 사랑이나 행복을 느낄 틈이 없었으니 본인 또한 자신의 가족이나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해 연민이 느껴지지요.


육군  의원님은 ‘2012년 의정대상’과 ‘국정감사 우수의정활동상’ 등을 수상하셨습니다. 19대 국회 1년을 보내신 소감과 앞으로 가장 우선을 두고 계신 의정활동이 있으시면 소개 부탁합니다. 또한 국방위 소속은 아니시지만 육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6·25참전 국가유공자 ‘나라사랑 보금자리’ 사업이나, 군대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 의원  “말로 애국하는 사람보다 행동으로 하는 사람, 베풀고 협력하고 화합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그 사회는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 사회가 더욱 더 건강해졌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계 어느 나라 건,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공훈을 세웠거나 희생한 분들께 국가가 보살피고 예우해서 그 분들의 은공을 보답하고 존경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국가유공자에 대한 인식이 잘못됐던 것인지 그 분들에 대한 예우와 지원이 미흡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분들이 무언가를 바라고 나라를 위해 자신들을 희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으므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 대한 충분한 예우는 마땅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육군이 생활여건과 주거 환경이 열악한 6·25참전 국가유공자의 자택을 새롭게 단장해 주는 ‘나라사랑 보금자리 사업’은 시의적절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군대 문화’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군의 선진 병영문화 개선이라는 르뽀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군은 2005년부터 대대적인 선진 병영문화 개선 사업 추진으로 여러 면에서 달라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와 같이 군에서는 선진 병영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여러 성과가 나타나고 있는데, 일부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보고 군 기강이 해이해지는 게 아니냐? 더 나약해지는 것 아니냐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는 최근 변화된 병영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 군대문화만을 생각한데서 오는 편견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창군이후 지난 60여 년 동안 군은 우리 사회에 음양으로 기여해왔고, 특히 강인한 정신이 오늘날 선진 대한민국을 만든 원동력이 되었음은 모두가 공감할 것입니다. 전투에서의 승리는 전투원의 사기에 좌우되므로 지금까지 잘 추진해 온 선진 병영문화를 지속 발전시켜 더욱 강한 군대로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육군  마지막으로, 육군이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한 당부의 말씀과 무더위 속에서도 교육훈련과 수해복구에도 노력하고 있는 육군 장병들을 위한 격려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 의원 우리 육군이 진정한 선진 정예강군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동북아 지역은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맞고 있습니다. 21세기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역사 인식과 영토·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역내의 정치적 갈등과 군사적 긴장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안보 환경은 더욱 유동적이고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전을 극복하고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지키자면, 무엇보다도 우리 육군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안보의 반석이 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안보환경에 대비하여 국방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국방 전반에 걸쳐 보다 가볍고 빠른 조직, 효율성과 튼튼한 기초를 갖춘 육군으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뜨거운 애국심으로 국방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육군 장병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우리 육군이 깨어있기에 오늘도 우리 국민은 편안히 잠들 수 있습니다. 계속된 장마와 무더운 날씨에도 열심히 교육훈련에 임하며, 복구 현장에서는 언제나 묵묵히 구슬땀을 흘리는 우리 육군 장병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국민들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육군 장병들을 굳건히 믿습니다.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충성!





육군  바쁘신 중에도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초의 부녀(父女) 국회의원 김을동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