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6·25를 환기시키는게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
《하필이면 여행 직전 심장에 이상이 왔다. 요제프 바그너 씨의 나이는 이미 85세였다. 급히 수술을 마친 의사는 여행이 힘들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바그너 씨에겐 반드시 가야 하는 여행이었다. 2008년 10월 23일 아침. 바그너 씨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거저 얻는 게 아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룩셈부르크 한국전쟁 참전용사회’의 모자를 챙겼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딸을 뒤로한 채 바그너 씨가 탄 비행기가 룩셈부르크 공항을 이륙했다. 캐나다 토론토, 미국 뉴욕, 캐나다 밴쿠버 섬으로 이어질 17일간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6·25전쟁 참전 뒤 룩셈부르크를 떠난 전우들을 만나기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를 여행. 바그너 씨는 잠시 눈을 감았다.》
소위로 참전했던 바그너씨, 美-加 방문 옛전우들 만나 금굴산 전투등 ‘그날’ 회상
17일간 여행, 다큐로 제작… “한국 발전상 자부심 느껴”
○ 그날의 기억
1951년 4월 22일 바그너 소위가 이끄는 룩셈부르크 소대가 배치된 미군 3사단은 임진강 북쪽 금굴산에서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았다. 중공군의 4월 공세가 시작됐다. 중공군 188사단이 임진강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다.
이대로 무너지면 경기 전곡리, 연천군, 철원군을 잇는 도로가 차단돼 다른 연합군까지 위기에 빠질 급박한 상황이었다. 적의 수와 위치, 행동반경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절실했다. 바그너 소위의 룩셈부르크 소대가 정찰을 자원했다. 적진 10km 깊숙이 숨어들었다. 적의 화염에 무방비로 노출됐지만 바그너 소위는 단 한 명의 소대원도 잃지 않았다.
○ 옛 전우들과의 만남
첫 도착지인 토론토에서 바그너 씨는 6·25전쟁 당시 소대원으로 생사고락을 같이했고 이후 캐나다로 이주한 레옹 무아얭 씨(79)와 포옹했다. 무아얭 씨는 1952년 5월 김포전투에서 수류탄 파편에 다리를 다쳐 일본의 미군 병원으로 후송됐다. 의사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했지만 무아얭 씨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전우들을 놔두고 집으로 갈 수 없다”며 전장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무아얭 씨의 전우애는 시공간을 뛰어넘었다. 무아얭 씨는 6·25전쟁 당시 부상했던 미군 참전용사 제임스 허버트 씨를 2002년에 만났다. 무아얭 씨는 그에게 미군이 전투 중 다친 장병에게 주는 훈장인 퍼플하트를 나무로 만들어 선물했다. 이때부터 무아얭 씨가 나무 퍼플하트를 만들면 허버트 씨가 이를 미국 워싱턴의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한 이라크전쟁 부상자들에게 전해주는 일이 시작됐다. 미군들의 감사 편지가 이어졌다.
무아얭 씨가 바그너 씨의 여행에 합류했다. 뉴욕에서 노르베르트 에데르트 씨(76)를 만났다. 60년 전 앳된 얼굴의 젊은이는 백발의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세 사람은 술집으로 향했다.
“적의 포화 속에서 헌신적이고 용감하게 고지의 통신선을 지켜내….” 옛 전우들을 만난 에데르트 씨는 큰 소리로 수십 년 전 무공훈장의 상훈을 달달 외웠다.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이었던 듯 상기된 얼굴로 맥주를 들이켰다.
이어 캐나다 밴쿠버 섬에서 안드레이 네이 씨(76)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결연했다. “당시 스탈린이 히틀러처럼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나는 결심했소. ‘내가 그것을 막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면 그걸 해야 한다!’고 말이오.”
네이 씨는 1953년 잣골전투에서 중공군의 포격으로 머리를 크게 다쳤다. “얼굴이 심하게 부어오르고 왼쪽 눈이 끔찍할 정도로 튀어나왔소.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고들 했지.”
전쟁은 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무아얭 씨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2년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눈을 감기만 하면 보고 싶지 않은 걸 봐야 했다. 낮보다 밤에 담배를 더 많이 피웠다. “아내가 그걸 어떻게 견뎠는지….”
○ 필름에 담은 전우애
바그너 씨는 이 특별한 여행에서 자부심과 노스탤지어와 상처를 함께 느꼈다.
이 여행은 다큐멘터리 영화 ‘참전(Tour of Duty)’으로 제작됐다. 지난해 10월 22일 룩셈부르크 시내의 가장 큰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시사회가 열렸다. 300석을 꽉 메웠고 서서 보는 관객도 많았다.
지난달 9일 룩셈부르크 시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바그너 씨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을 힘겹게 하나하나 토해냈다. 안경을 벗고 눈을 치켜떴다. 손은 떨렸다. 기억이 혼란스러울 때면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전쟁 때 만난 한국 아이들 얘기에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처절한 모습에….” 60년 전 강직하고 남자다웠던 바그너 소위. 그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참 뒤 그는 “2005년 한국을 찾았다. 세계로 진출하는 한국 젊은이들의 자신감이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군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다시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에게 2008년의 여행은 또 하나의 ‘참전’이었다. “60년이 지났지만 흩어져 있는 전우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군인으로서 해야 할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했네.”
○ 에필로그
다음 날 그는 기자를 룩셈부르크 시에서 차로 40분가량 떨어진 자신의 고향마을 에히터나흐로 초대했다. 만나는 마을 사람마다 “한국에서 참전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 동아일보 기자가 왔다”고 소개했다.
기자는 마을에서 바그너 씨가 털어놓지 않았던 젊은 시절의 상흔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18세 때인 1943년 독일 나치군에 강제 징용됐다가 1944년 탈영해 13개월 동안 좁은 농가에 숨어 지냈다. 그는 해방 뒤 룩셈부르크군이 창설되자마다 입대했다.
기자가 물었다. “나치즘에서 탈출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전하셨는데, 나치 치하에서 룩셈부르크가 받은 고통을 한국이 공산주의로부터 받아서는 안 된다고 직감하신 건가요?”
바그너 씨는 그윽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룩셈부르크 참전 개요:
룩셈부르크군은 1951년 1∼8월, 1952년 3월∼1953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벨기에 대대에 배속돼 6·25전쟁에 참전했다. 89명이 참전해 2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부상했다. 참전 규모는 작았지만 임진강과 철의 삼각지대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룩셈부르크의 인구는 20만 명에 불과했다.
▼ 한국선 잊혀진 용사, 룩셈부르크선 영웅 ▼
현지 참전비에 자국 영웅과 함께 ‘강윤섭’ 이름 새겨
레몽 베랭제 당시 상병(2006년 별세)이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기관총을 들고 진지 위로 뛰쳐나왔다. 무수히 많은 총알과 포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적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베랭제 씨의 용기에 자극받은 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49년 뒤인 2002년 미군 제3사단이 룩셈부르크를 찾아 베랭제 씨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한국전참전용사협회 사무총장인 길베르트 하이펠스 씨(77)는 “그의 영웅적 용기 덕분에 철의 삼각지대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룩셈부르크 시에서 40km 떨어진 디키르슈에 있는 국립 군역사박물관 내 한국전쟁 코너도 베랭제 씨의 노력으로 탄생했다. 그가 당시 사용한 기관총도 전시돼 있다.
그러나 베랭제 씨와 함께 진지 위로 뛰어올라 적에게 기관총을 난사한 또 다른 영웅이 있었다. 하이펠스 씨가 그의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
‘Kang Yun Soup(강윤섭).’
베랭제 씨는 6·25전쟁 이후 40년간 전우 강 씨를 찾았다. 주한 룩셈부르크대사관을 통해 마침내 강 씨의 소재를 알았고 룩셈부르크 참전용사협회는 1993년 강 씨를 룩셈부르크로 초청해 훈장을 수여했다.
하이펠스 씨는 “전쟁 당시 부대에서 식량과 무기를 운반했던 그는 매우 성실한 전우였지만 40년 만에 만난 그는 참전에 대한 자부심보다 가난에 찌든 초췌한 모습이었다.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강 씨의 이름이 룩셈부르크 참전기념비에 추가됐다. 하이펠스 씨는 “한국 사람들은 강 씨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잊혀진 존재일 것”이라고 말했다.
■ 다큐 ‘참전’ 감독 그로츠씨
“용병 편견 깨… 자유 지킨 용사로 기억될 것”
프렝크 그로츠 감독(32·사진)은 60년 전의 비극을 대면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참전’을 촬영하며 편견과 싸워야 했다.
“학창 시절 두꺼운 역사책의 한 페이지나 차지했을까요?” 그는 이전까지 6·25전쟁에 참전한 룩셈부르크 용사들을 전쟁광이나 용병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2006년 6·25 참전 용사들의 진솔한 모습을 필름에 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촬영을 준비하며 그는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전쟁 당시 인구 20만 명밖에 되지 않았던 룩셈부르크에서 군인 89명은 한결같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싸우겠다고 결심했다. 고국에 돌아올 때는 환영행사도 받지 못했지만 자부심을 잃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로츠 감독은 “가슴이 뜨거워졌고 그들을 존경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8년 참전용사 요제프 바그너 씨와 동행하며 촬영을 진행하면서 룩셈부르크인 단 한 사람에게라도 이들의 참모습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로츠 감독에게 영화 제작을 제안한 주인공은 생존 참전용사 22명 전원을 만나 연구해온 룩셈부르크 역사가 파트리크 모르만 씨(36)다. 6·25전쟁 영화를 찍은 사람도, 연구한 사람도 모두 30대 젊은이였다.
룩셈부르크·디키르슈·에히터나흐=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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