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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2> 미국(中)-참전 가족들의 가슴앓이

“실종됐다던 오빠가 57년만에 돌아왔다… 한 줌 유해로”
부상 송환 거부 트렌트 상병
다시 참전해 청천강서 전사
2000년 유해발굴 신원확인

칠순 노파된 ‘9세 막내동생’
“기다림의 납덩이 내려놓고
굴곡의 가족사 한 장 접어”



그는 지긋지긋한 학교를 떠나 군인이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얼마 후 코리아라는 낯선 전쟁터로 떠나갔다. 참전 5개월 만에 ‘전쟁 중 실종’을 알리는 전보가 그의 가족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가슴앓이는 시작됐다.

2007년 10월 미국 워싱턴 외곽 알링턴 국립묘지에 도널드 트렌트 미 육군 상병이 묻혔다. 가족들은 실종 57년 만에 한 줌의 뼛조각으로 돌아온 그를 보면서 상처로 얼룩진 가족사의 한 장(章)을 이제는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트렌트의 부모님은 이미 1970, 80년대에 숨을 거뒀다.

해리엇 듀란 씨(71)는 도널드의 막내 여동생이다. 9세 소녀 시절 큰오빠의 입대와 실종 소식을 접한 이래 수십 년 동안 사라진 오빠의 기억을 안고 살아 온 그를 5일 네바다 주의 소도시 스파크스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국방부로부터 “오빠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2007년 5월을 떠올렸다. 그전까지 정부가 설명했던 것과 달리 오빠는 전쟁포로가 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증언에 따르면 트렌트는 1950년 11월 말 평안도 구장군의 청천강변에서 중공군의 총을 맞고 전사했다.

듀란 씨는 “그 소식을 듣고 납덩어리를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소식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으니…”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고통이 길었을) 포로수용소 생활보다는 빨리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도 했다. 듀란 씨는 1990년대 말부터 전쟁 중 실종된 미군 가족들과 교유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며 지내왔다.

트렌트 상병은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참전 1개월 만에 부상해 ‘본국 송환’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그는 1개월간 일본에서 병원 신세를 진 뒤 “동료와 함께 싸우겠다”며 다시 한국행을 희망했다.

그의 유골은 청천강변 농가 주변에서 발굴됐다. 북-미 간에 반짝 화해 기류가 흐르던 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인 2000년의 일이었다. 그는 총에 맞아 죽은 뒤 이 농가 주변에 매장됐고, 젊은 시절 이를 목격했던 한 북한 농부의 신고에 따라 미군은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발굴 결과 뼛조각 20여 개와 치열 흔적이 나왔고, DNA 검사를 통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듀란 씨는 어릴 적 ‘(키가) 큰 오빠’로만 기억했던 오빠의 신장이 167cm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트렌트 가족의 지난 50여 년은 망가진 삶(devastation)이었다고 듀란 씨는 회고했다. 아들의 공백에 부모는 괴로워했다. 집으로 부친 편지에서 어머니의 걱정을 염려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빼먹지 않던 아들이었다.

특히 군인이 되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다른 오빠가 타고 가던 헬리콥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받은 부모님의 충격은 컸다. 다행히 이 오빠는 죽지 않고 생존했다. 어머니는 눈을 감는 순간에도 “절대 오빠 찾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듀란 씨는 ‘북한과 중국을 원망하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오빠는 군인이 되고 싶어 했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전쟁에 참여한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빠는 1947년 고향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군 입대를 위해 가출했다. 사라진 오빠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만, 그날 밤 오빠는 켄터키 주의 훈련소에서 전화로 “아버지, 오늘 군에 입대했어요”라고 소식을 알려와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듀란 씨는 “유일한 여동생인 나를 오빠는 각별히 예뻐했다”며 “(비록 통화였지만) 그때처럼 오빠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당시 오빠는 만 18세가 돼야 하는 군 입대 조건을 맞추기 위해 나이를 거짓으로 한 살 올려 신고했다고 한다.

“생후 13개월 때 죽은 큰언니가 있었지. 난 만나 본 적도 없지만. 부모님은 각각 숨을 거두면서 하늘에서 첫딸과 큰아들이 자신들을 기다릴 것으로 확신했을 거라고 믿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재회의 기쁨을 누렸을 거야.”

듀란 씨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삶의 새로운 장을 살아가고 있었다.
글·사진 스파크스(네바다 주)·포트웨인(인디애나 주)= 김승련 기자srkim@donga.com

▼美에 6·25 알리는 참전용사들의 방송국 “큐!”
참전 4명 자원봉사로 제작
“한국서 우릴 찾아오다니”
녹화 끝난뒤 눈시울 붉혀▼

30평 남짓한 스튜디오에 조명이 켜지고 6·25전쟁 참전용사 20여 명과 가족들이 자리에 앉았다. 카메라맨, 엔지니어, 디렉터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오전 10시 45분. 출연자에게 응시해야 할 카메라 번호를 숙지시키고 마이크 테스트가 끝나자 큐 사인이 떨어졌다.


“굿 이브닝, 아메리카. 오늘밤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의무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제임스 예니 씨(당시 육군 일병)가 잊혀져 가는 6·25전쟁의 참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2005년 시작한 ‘텔아메리카(Tell America)방송’의 3일 녹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예니 씨와 참전용사 3명은 인디애나 주의 포트웨인에서 공익방송인 액세스(ACCESS)TV 스튜디오를 무상으로 빌려 3주에 1번씩 녹화를 한다. 순수 자원봉사로 만들어진 이 녹화물들은 매주 목요일 오후 9시에 케이블TV 채널 57번에 1시간씩 방송되고, 인터넷TV(IPTV)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이날 녹화는 독특한 형식으로 진행됐다. ‘게스트’인 기자가 이 프로그램의 ‘호스트’ 역할을 맡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자가 예니 씨를 포함해 출연한 노병들을 인터뷰하는 ‘방송 속 신문 인터뷰’ 형식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동아일보가 60년 전 6·25전쟁에 참전했던 노병들의 생생한 개인사를 듣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하자 예니 씨는 “그래, 인터뷰를 하자. 출연자를 10명 이상 섭외해 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우리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하고, 우리는 그 촬영 내용을 방송하겠다”고 수정 제안한 것이었다.

이날 참전용사 인터뷰 과정에서 인디애나 주의 한 중학교 사회 교사인 리네트 월리스 씨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수업시간에 참전용사를 초청해 어린 학생들에게 자유를 지킨 영웅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소개했다.

30분간의 휴식을 빼고 4시간 넘게 계속된 이날 방송은 특별한 NG 없이 술술 진행됐다. 맨 마지막 순서로 예니 씨와 3명의 방송팀을 인터뷰했다. 예니 씨는 “한국전쟁에 대한 미군의 희생과 감회를 뉴스레터 제작, 중고교 1일 교사 등을 통해 미국인에게 알려왔는데, 이런 것을 방송에 올릴 수는 없을까라는 황당한 생각을 현실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6·25전쟁 참전용사이자 방송팀 일원인 윌리엄 헐린저 씨는 “이 방송은 미국인과 교감하는 좋은 창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버지니아 주의 중학교 1학년생이 인터넷을 통해 ‘한국전쟁에 대한 학교 숙제를 도와 달라’고 연락해 왔는데, 이들은 “질문거리를 알려주면 관련 방송을 만들 테니 참고해서 글을 쓰라”고 답한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방송 녹화가 끝나 카메라의 빨간 불이 꺼진 뒤 예니 씨는 방송인이 아닌 60년 전의 향수를 지닌 노병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국 고아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옛 전우의 흑백사진을 보여주면서 거기에 적힌 ‘산타 노릇을 했다(play Santa)’는 문구를 읽으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또 한국의 신문기자가 지구 반대편의 방송국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눈시울을 붉혔다.

▼인터뷰에 온 老兵 손엔 참전당시 먹었던 캐러멜 한통이…▼

미국의 참전용사들은 60년 전 6·25전쟁의 기억을 되살릴 물건이나 자료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특히 멜빈 버틀러 씨는 미 육군부가 그의 가족에게 보낸 ‘1952년 2월 13일 이후 아들이 실종됐다’는 실종 통보 전보의 원본을 간직하고 있었다. 버틀러 씨는 “실제로 나는 9일간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쳐 나왔다”고 회고했다. 한 노병은 투치롤(Tootsie Roll)이라는 캐러멜 한 통을 들고 왔다. 그는 “꽁꽁 언 햄과 쇠고기를 먹으면 소화불량으로 힘이 더 빠졌다. 그래서 즐겨 먹은 게 이 캐러멜이었다”며 “최소한 이걸 씹는 동안에는 얼굴 근육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투치롤은 ‘탄약(ammo)’이란 별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중공군 감청을 피하려 본부에 “탄약을 공수해 달라”고 무전을 치면 얼마 뒤 공군이 ‘캐러멜’을 공중 투하하곤 했다고 이들은 회고했다.

전쟁의 기억이 모두 고통뿐이었을까. ‘언제 크게 웃어봤느냐’는 질문에 한 참전용사는 “노란 눈(yellow snow)은 먹지 말아야지”라고 답했다. 이 말에 다른 노병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마실 물이 얼어 주위에 쌓인 눈으로 갈증을 풀 수밖에 없었는데, 누군가의 소변이 섞인 눈을 먹는 경우가 가끔 있어 그때마다 깔깔 웃었다는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