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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사랑스런 그들

 내가 입대할 무렵, 군대의 내무생활은 거의 혁명 수준의 개선이 시작되었다. 27사단 신교대에 입소할 때부터 조교들의 욕설과 반말은 들을 수 없었다. 내심 화끈한 훈련병 생활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건 너무 편했다. 물론 몸은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 편했다는 말이다. 입대 전 선배들이 들려준 무수한 무용담이 전혀 와닿지 않았다. 중국에서의 대학시절, 우리나라 체육대학보다 더 빡세다고 자부할 수 있는 선후배 관계를 경험한 내게 신교대 생활은 고등학교 수업을 받는 기분이었다.
자대배치를 받은 나는 본격적인 내무생활에 들어갔다. 눈치 하나는 기막히게 빨랐던 나는 누구보다도 완벽한 위장 군기와 샤바샤바로 험난한 막내 생활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군대스리가 데뷔전과 폭풍구보를 통해 저질 체력이 뽀록난 이후 한동안 개갈굼을 먹었지만 대망의 첫 훈련인 유격훈련을 어렵사리 버텨내자 다시 평화의 시간이 찾아왔다.
유격훈련에서 복귀하고 얼마 뒤, 우리 분대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중대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나는 분대 수저통을 소중히 들고 힘차게 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연병장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군가를 부르고 있는 내 눈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대대  지휘통제실 앞에 빵모자를 눌러쓰고 떠블백을 메고 있는 한 무리. ‘오오, 신병이다. 신병이 온 거다!’
그날 저녁, 내무실에서 총을 닦고 있는데 행정반으로부터 전파가 왔다.“3소대 가츠 이병, 행정반으로.”
사실 이등병을 직접 지목해서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 대개는 이런 내용이다. “각 소대 작업인원 3명씩 행정반으로.” 이등병에게 행정반으로 전화가 올 리도 없고, 특정한 일을 시킬리도 없으니 말이다. 내심 분대장도 긴장한 듯, ‘너 무슨 사고 쳤어?’ 라는 표정이었다. 당시 분대장은 유격 3년차를 이수하고 전역을 3주 남긴 말년이었다. 말 그대로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되는 판국이었다. 나도 나름대로 긴장하면서 행정반에 들어갔다.

“이병 가츠, 행정반 용무있어 왔습니다!”

그날 당직사관은 우리 부소대장이었다. 이등병에게는 천사 그 자체이지만 고참들에게는 지옥에서 만난 야차 같은 존재였다. 한 마디로 말보다 손이 빠르고 손보다 발이 빠른 캐릭터였다. 그런 부소대장이 나를 부른 것이다.

“우리 가츠, 소포 왔네. 뭔지 열어 보자꾸나~!”


순간, 머리가 띵했다. 이등병에게 소포라니! 나도 모르는 소포라니!! 나도 모르니 분대장에게 보고도 안 된 소포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게 소포를 보낼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이나 여친에게는 나를 죽이고 싶으면 소포를 보내라고 미리 엄포를 놨는데. 그럼 도대체 누가 보낸 거냐 말이다.
주소를 보니 서울에서 온 소포였다. 보낸 사람은 대학 선배였다. 그것도 친형마큼이나 가까운 선배였다. 그 형은 당시 수방사 헌병대에서 복무 중이었다. 이 양반이 날 너무 사랑한 나머지 정녕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드디어 부소대장님의 칼질이 시작되었고 소포상자는 개봉되었다. 뚜둥~!
상자 안에는 편지 한 통과 사제 전투모가 들어 있었다. 얼마 뒤에 백일휴가를 나갈 테니 그 때 쓰라는 눈물겨운 사연이었다. 부소대장이 껄껄 웃으며 “좋은 선배 뒀구나”라고 말한 순간, 상자 바닥에 놓인 작은 명함이 모두의 눈을 사로잡았다. 수방사 헌병대장의 그윽한 미소가 프린팅되어 있는 한 장의 명함!
‘전우여, 고민이 있으면 주저 말고 전화하여라’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헌병대라면 치가 떨리는 부소대장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었다. 

“가츠야, 이 아저씨 누구야? 삼촌이야? 아빠 친구야?”
“이병 가츠!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근데 이게 여기 왜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전국 각 부대의 사건 사고가 시시각각 취합되는 수방사 헌병대에 근무하던 선배는 당시에 탈영과 자살 사건 보고를 자주 접했다고 한다. 행여나 내가 딴맘 먹고 사고를 칠까 봐, 못 견디게 힘들면 차라리 전화를 하라는 의도로 명함을 보냈다고 했다. 덕분에 잘 살고 있던 내가 죽을 뻔했지
만. 부소대장은 나를 붙잡고 이리저리 추궁했지만, 나 또한 자세한 정황을 알 리 만무했다. 결국 “가츠 너도 모르는 사람이니 이 명함은 우리가 보는 데서 찢어서 버리자, 오케이?”라는 말로 결론을 지었다. 명함은 산산조각이 났고 나는 편지와 전투모를 들고 내무실로 돌아갔다. 고참들의 놀림이 시작되었고, 우리 불쌍한 분대장은 힘없이 분대장 수첩을 들고 내게 손짓했다.

 “너마저 나를 피 말려 죽이려고 하는구나. 나 이제 다섯 밤만 자면 말년휴가 가. 제발 나 좀 집에 고이 보내주면 안 되겠니?”

그의 눈망울은 사슴처럼 슬퍼보였고, 신병 관찰일지를 작성하는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다음날 일병들로부터 개갈굼 먹은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선물로 받은 사제 전투모는 어떻게 됐냐고?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서러운 눈물을 훔치며 중대 창고에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그야말로 기막힌 반전이었다. 오, 신이시여! 이런 기쁨을 주시려고 저에게 그토록 아픈 시련을 내리셨나이까? 얼씨구나, 가츠의 군생활에도 봄날이 도래했구나! 드디어 막내인 내 밑으로 신병들이 들어온 것이다. 싱싱한 3월 군번 2명이 우리 소대로 배정되었다. 그들을 픽업해 온 분대장들은 자부심이 넘치다 못해 자만심이 내무실 천정을 뚫고 있었다.

“야 이것들아, 형의 신들린 짱깨(가위바위보) 실력으로 요 녀석들을 뽑아왔다. 본좌를 칭송하여라~!”

 내 앞에 서있는 두 명의 신병. 오호 딱 봐도 물건들이었다. 서이병은 186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탄탄한 체격, 송이병프로복서 출신에다 야무진 몸매. 불과 한 달 전, 내게 기만당한 고참들마저도 이번엔 제대로 된 놈들이 왔다며 만족스러워 했다. 그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2박 3일의 황금 같은 주말을 보내고, 첫 아침구보의 날이 찾아왔다. 천진난만한 녀석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점호를 취하고 있었다. 당사자 2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과연 녀석들이 완주할 수 있을까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내 기대를 저버리고 이 녀석들 둘 다 무사히 완주했다. 당시 당직사관이 말년 중사인 1소대장이어서 1.5킬로미터만 찍고 돌아왔던 이유도 있었다. 죽음의 폭풍구보를 통한 검증은 되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녀석들로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우리 중대는 군지휘검열 훈련 때문에 당일치기 화악산 매봉 정찰을 명령받고 출동했다. 화악산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과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서 높이는 아담하게 딱 1,468미터다. 경기도에서는 가장 높은 산으로서 경기 5악 중 으뜸으로 치며 이기자 부대의 주요 작계지역이었다.
줄기차게 올라가면 고지까지 대략 2시간가량 소요된다.
여느 때처럼 우린 보병신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정상을 향해 힘차게 돌진했다. 이미 몇 차례의 출동과 처절했던 유격훈련을 통해 한층 업그레이드 된 가츠였지만, 화악산은 죽도록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폭풍구보의 창시자 소대장이 선봉에 섰다.
 
“말년에 무슨 개뺑이냐?”

소대장은 투덜거리면서도 미친 듯한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분대 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야이 똘아이야! 똑바로 안 걸어? 어쭈, 쇼를 하는구만. 이 색히 엉덩이 실룩실룩 거리는 봐라. 확 죽여버릴라! 안 올라가?”

 그렇다. 우리의 서이병에게 한계가 온 것이다. 얼핏 돌아 그의 상태를 보니, 이미 동공이 풀렸고 영혼은 그의 강인한 육체를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일명 유체이탈이 시작된 것이다. 그냥 멍하니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렇다면 프로복서 출신의 송이병은 잘하고 있는 걸까? 2분대 쪽을 보니 아직까지는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혼자서 우리 소대원 전체의 땀을 대신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권투를 할 때
감량하던 가락이 있어서 남들보다 땀이 쉽게 나는구나 생각했다.
1시간쯤 올라갔을까? 잠깐 쉴 법도 한데, 우리 소대장은 쉬는 시간도 아깝다며 주구장창 올라가신다.
서이병은 이미 단독군장 해제 상태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고, 그의 고참들은 그의 총과 조끼, 탄띠를 대신 들고는 연방 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10분이 지났을 무렵, 2분대 쪽에서도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송이병도 뒤처지기 시작한 거다. 솔직히 그 녀석은 정말 낙오하지 않을 줄 알았다. 황당해진 2분대 고참들은
득달같이 전직 복서를 갈구기 시작했다.

“야이 미친 색히! 너 임마, 운동선수잖아. 네가 왜 낙오해? 이런 나약한 놈! 너 미친거 아냐?'”

그 순간, 내 군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한 마디가 송이병 입에서 처절하게 흘러나왔다.

“허억, 헉헉... 정상병님! 복싱은 3분 뛰고 쉬었다 합니다. 살려주세요! 엉엉...”

그 사건 이후로 이 녀석들도 비자발적 금연에 돌입해야 했고, 심한 갈굼과 격한 단련이라는 지옥을 한동안 거친 뒤에 그들 생애 최고의 담배맛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