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들의 술자리 후일담 중 최악의 스토리가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라고들 한다. 축구가 총 쏘고 행군하는 것만큼이나 군대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 군인들은 그토록 축구에 목을 매는가?
축구는 전쟁이다. 상대편 골대에 공을 집어넣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온 몸을 부딪히며 돌진하는 모습은, 치열한 백병전 끝에 고지를 점령하는 각개전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더구나 축구는 혼자 잘한다고 이길 수 있는 개인 운동이 아니다. 전쟁터에서만큼이나 단단한 팀웍이 요구되는 운동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군대에는 ‘축구력=전투력’이라는 독특한 등식이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화려한 기술보다는 우직한 체력과 근성이 군대 축구에서 강조되는 이유다. 군대에서 축구를 전투체육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금요일 오후에 소대 배치를 받고 처음 맞이하는 아침이었다. 나와 내 동기 박이병은 기상과 동시에 내무실 침상에 각을 잡고 앉아 있었다. 같은 처지의 동기들과 허물없이 지냈던 신교대와 달리, 온통 하늘 같은 고참들뿐인 자대에서의 첫날은 긴장 그 자체였다.
우리 부대는 토요일 오전에는 항상 산악행군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전날, 전체 병력이 대규모 훈련을 뛰고 복귀했기 때문에 그날은 정비를 위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당연히 옆 소대와의 축구 시합이 예정되어 있었다. 소대 고참 박병장이 다가오더니 우리에게 물었다.
“신병들 축구 좋아하나?”
“이병 가츠. 네, 좋아합니다~!”
“이병 박근우. 네, 좋아합니다~!”
우리는 동시에 외치면서, 축구에 대해 강한 의욕을 보였다. (사실 신병은 모든 것에 의욕을 보여야 한다.) 동기 녀석인 박이병은 실제로도 상당한 축구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는 몰랐지만 말이다. 겉모습만 보기에는 박이병보다 키도 크고 덩치가 있는 내가 공을 잘 찰 것 같았나 보다. 박병장은 내게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다.“오호, 그래? 가츠 너 운동 좀 했구나?”“이병 가츠. 네, 대학 다닐 때 농구부, 볼링부에서 활동했습니다.”“호오, 진짜? 축구는, 축구는?”“축구부에서도 활동했습니다.
“와우! 그레이트 맨, 웰컴 맨!”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분명히 농구부, 볼링부, 축구부 활동을 했다. 그런데 농구부나 볼링부는 자진해서 가입했지만, 인원이 부족했던 축구부는 선배들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입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게다가 한국 대학에서의 운동부원이라고 하면 전문적인 선수들이지만, 그곳 운동부는 그냥 동아리 정도라고 이해하시면 되겠다. 하지만 그것까지 굳이 박병장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가만히 있었다. 박병장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흥분하더니 소대원들에게 소리쳤다.“야아! 드디어 우리소대에 초특급 유망주가 왔어! 하하, 용병이야 용병.”“우와, 진짜입니까?”“대학 축구부에서 뛰었다잖아. 어쩐지 체격도 좋고 눈빛도 남다르더라. 머리도 엄청 크잖아? 저 자식, 헤딩 겁나 잘할 거 같애. 이제 더 이상 2소대는 우리의 적수가 아니다!”
상황이 뭔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괜히 말했나? 사실 내 축구 실력은 허접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체육시간에는 친구들과 담소를 즐기며 일광욕을 했고, 더운 날 운동장에서 땀 뻘뻘 흘리며 고생 하는 녀석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의 속사정도 모르고, 일병들은 내게 끊임없이 부러운 눈빛을 던졌다. 전입오자마자 고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니 나아가서는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의 사랑까지 말이다.
소대원들의 부러움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나는 군대스리가에 정식으로 데뷔하게 된 것이다. 곧이어 김일병이 나를 위해 친히 축구화까지 챙겨가지고 왔다. 이거 정말 X됐다! 아직 군생활이 692일이나 남았는데, 오늘 종지부를 찍게 되는 건 아닐까? 온갖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모두들 연병장으로 집합했다. 소대원들은 각기 자리를 잡고 응원을 시작했고, 출전 선수들은 몸을 풀기 시작했다. 나도 몸풀기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우아하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거의 베르바토프 수준의 포스가 뿜어져 나왔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소대원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야, 저 녀석 몸푸는 것도 완전 프로다, 프로!”
뭐야, 이것들이 나만 주시하고 있잖아, 젠장! 바로 그때, 코너 부근에 있던 내 쪽으로 공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왔다.“야, 신병, 센터링 올려봐.”
헐... 초장부터 뽀록나게 생겼다. 하지만, 바싹 든 군기 때문인지 평생 한 번 찾아오는 행운이 따른 덕분인지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까지도 그때 그 크로스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집중력 500배, 최고의 정성을 다해 죽기 살기로 공을 차올렸다.슈우우우웅~
오오! 내가 찬 거지만, 정말 멋있었다. 베컴의 택배 크로스가 이토록 정확하게 날아갈까 싶을 정도로, 내 인생 최고의 크로스가 골대를 향해 파고들었다. 천 번을 다시 해도 그렇게는 못 찰 아름다운 크로스였다. 속으로는 너무 놀랐지만, 뭐 이 정도쯤이야 하는 포즈와 표정으로 애써 담담함을 가장했다. 혹시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축구 재능이 바로 그날 튀어나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잠깐 들었다. 그 순간 약간의 거만함이 내 입가를 물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습을 본 소대원들 사이에서는 또 한번 난리가 났다.“야, 방금 봤냐? 우와 베컴 온 줄 알았네. 저 녀석 진짜 킹왕짱인데!”
나는 당당히 박지성과 같은 포지션인 오른쪽 날개를 부여받았고, 마침내 2소대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2소대원들도 내 소문을 이미 들었는지 도통 내쪽으로는 공이 오지 않았다. 경기가 시작되고 한참 동안은 공이 반대쪽에서만 오갔고, 그때까지는 다행스럽게도 내 실력이 들통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뛰었을까? 헉헉..... 숨이 차오른다! 공 한 번 못 만져보고 왔다 갔다 뛰기만 했는데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박병장이 나를 부르며 정확한 공간패스를 찔러 주었다. 오, 저거 크로스만 해주면 되는데, 되는데.....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어흑흑흑, 죽기살기로 뛰어가서 중앙을 향해 멋있게 크로스를 올리려고 하는 순간, 헉, 맙소사! 내 오른발은 허공을 힘차게 갈랐고 공은 그대로 골라인 아웃이 되어버렸다. 순간 당황한 소대원들, 애써 침착해 하면서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파이팅을 외쳤다. 그리고 또 찾아온 찬스. 이번에는 앞뒤 볼 것 없이 ‘아무나 받아라 슛‘을 날렸는데, 어이없게도 ’대기권 돌파 슛‘이 되어버렸다.
몇 번의 찬스를 번번이 놓치자, 2소대원들도 내 실력을 눈치 챈 것 같았다. 내가 우리 소대의 구멍이라는 것을 간파했는지 내 쪽으로만 집요하게 돌파를 시도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보란 듯이 나를 제끼고 가는 2소대원들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문득 뒤통수가 무지 따가웠다. 살짝 돌아보니, 나를 향해 죽일듯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는 박병장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그의 사자후가 연병장에 울려 퍼졌다.
“나가~!!!”
그날 내 군대스리가 데뷔 경기는 곧바로 은퇴 경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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