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께서 ‘한국전쟁 전몰장병 유해 발굴 현장’ 내용을 보시고 호국선열의 고귀한 희생과 전문발굴병사들의 노고에 잔잔한 감동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해 발굴을 통해 수습된 전몰장병의 유해가 어떤 과정을 거쳐 국립묘지에 장치되는지 그 다음이야기를 궁금해 하셨습니다. 때마침 국립대전현충원에서 6·25전사자 합동안장식이 거행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특히 이번 6·25전사자 발굴유해 합동 안장식은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이 직접 주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는 바로 한국전쟁 당시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다 장렬히 산화하신, 호국선열 합동 안장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무더위와 집중호우가 번갈아 가며 한반도를 강타했던 지난 7월 16일, 6·25전사자 발굴유해 합동안장식이 거행되는 대전국립현충원을 찾았습니다. 당장이라도 비가내릴 듯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날씨 탓인지 국립대전현충원으로 향하는 기자의 발걸음도 무겁습니다. 이날 행사는 올해 발굴한 국군장병 유해 824구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유해 9위에 대한 합동 안장식이라고 합니다. 행사가 진행될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관 실내에 들어서니 유가족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이미 도착해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 이날 합동 안장식에는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해 많은 장군들이 참석해 고인의 넋을 추모했습니다.
임충빈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진행된 이날 합동 안장식에는 주요 지휘관 및 참모, 고인의 한국전쟁 당시 참전 소속부대 대표, 유가족과 재향군인회 및 보훈처 관계자, 군악대, 의장대, 육군 군기단, 조총병, 영현 봉송병 등 37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개식사와 함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합동 안장식이 시작됐습니다. 제단위에 모셔진 고인들의 영현을 보니 가슴 한편이 먹먹해 집니다. 고인에 대한 경례에 이어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이 고인의 무공훈장을 유가족 한분 한분에게 전달해 드렸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철부지 어린이였던 고인의 친형제, 친지 등 직계 유가족들의 머리위에 어느새 하얀 서리가 내렸습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이날 화랑무공훈장이 전수된 故 전경섭 중위, 故 김태고 하사, 故 김용낙 하사, 故 김영철 일병은 당시 전시 상훈법에 따라 일선 사단장으로부터 약식증서만 교부받고 실제 훈장은 교부받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왜 고인들이 이제야 실제 무공훈장을 전수 받은 것일까요? 전투 중 뛰어난 무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훈장을 받지 못할 만큼 당시 전황이 급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고인들은 남다른 의협심과 애국심으로 전사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셨다고 합니다. 솔직히 저라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비록 무공훈장을 수여 받지는 못했지만 다른 4위의 호국선열들 역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희생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이 故 김용낙 하사의 동생 김용향(73세) 선생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날 전사한 故 김용낙 하사를 대신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고인의 동생, 김용향(73세) 선생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한동안 아무 말씀도 못하셨습니다. 故 김용낙 하사가 육군 5사단 소속으로 양구에서 치열한 격전 중 전사했을 당시 15살 청소년이었던 김용향 선생은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김용향 선생은 고인에 대해 “의협심이 남달랐고 전투 중 다리에 부상을 당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전사하셨다”며 “뒤늦게나마 형님의 유해를 되찾고 국립묘지에 모실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고 소회를 전했습니다.
↑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이 호국선열의 넋을 기리며 분향하고 있습니다.
무공훈장 수여 후 조사와 종교의식이 이어집니다. 잠시 짬을 내 보도자료를 살펴보니 고인들의 사연 하나 하나가 모두 가슴에 와 닿습니다. 유해발굴사업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중대장급 장교의 유해가 발굴된 사례라는 故 고희경 대위(육사 9기)는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1950년 8월 수도사단 17연대 2대대 중대장으로 임무 수행 중 30세의 꽃다운 나이에 전사하셨다고 합니다. 영월지역에서 전투 중 전사한 故 김영철 일병의 경우 부친이 시신을 수습하여 하동면 옥동리 사택 부근에 임시로 매장해 관리해 온 것을 발굴한 것이라고 합니다. 함안에서 발굴한 4위는 전쟁당시 유골함이 본가에 봉송되어 가야읍 혈곡리 마을 주변에 임시로 매장해 관리해 오던 것을 수습한 경우라고 합니다. 서울 상왕십리 소재 안정사 사찰에 보관된 유해 3위는 사찰 이전을 준비하던 중 국군 전사자 유골함이 발견되어 수습한 것으로 유골함 기록이 신원 확인에 결정적 단서가 됐다고 합니다.
↑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은 전몰장병 유해 수습과정에서 함께 발굴된 당시 무기들과 유품 등을 전시해 유가족 및 합동 안장식 참석자들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종교의식이 모두 끝났습니다.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의 추도사가 이어집니다.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은 이날 합동 안장식 추도사를 통해 “호국선열의 유해를 끝까지 찾아내 조국의 품에서 평안히 영면하실 수 있도록 하는 일이야 말로 군과 국민 모두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책무이자 무한책임의 국가사명”이라고 강조한 뒤 “전국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유해발굴활동에 정성을 다하고 범국가적 차원의 관심과 노력을 바탕으로 마지막 남은 호국선열 한 분까지 조국과 가족의 품에 모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 합동 안장식이 모두 끝났습니다. 봉송병들에 의해 고인의 영현과 무공훈장이 차례로 현충관 밖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은 전사자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화장된 전사자의 유골함을 병적에 기록된 본가로 최대한 봉송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피난을 떠나 전달 자체가 제한되는 상황이 발생해 읍·면 단위 지역사회에서 전사자의 유골함을 유가족 대신 받아 마을 주변에 매장하거나 사찰 등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피난을 떠났던 전사자의 유가족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오지 않거나 유골함과 관련된 기억이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지면서 그간 전사자의 유골함이 본의 아니게 방치되어 온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고인들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모시게 되어 다행입니다.
↑ 호국선열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육군 주요 부대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육군 군기단은 대한민국 육군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헌화 및 분향이 끝나자 조총발사 및 묵념이 이어집니다. 이제 모든 행사가 끝났습니다. 봉송병들이 차례대로 영현을 들고 고인들이 영면할 개별 묘역으로 이동합니다. 하늘에선 한 두 방울씩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절로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지난 2000년 유해발굴 사업을 시작한 이래 우리 군은 총 3719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며 이 가운데 국군 55위의 신원확인을 완료, 이날 합동 안장식까지 53위의 국군전사자를 국립묘지에 안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이름 모를 산야에 홀로 남겨진 13만 호국용사의 유해를 모두 찾아 국립현충원에 모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무더위와 집중호우가 번갈아 가며 한반도를 강타했던 지난 7월 16일, 6·25전사자 발굴유해 합동안장식이 거행되는 대전국립현충원을 찾았습니다. 당장이라도 비가내릴 듯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날씨 탓인지 국립대전현충원으로 향하는 기자의 발걸음도 무겁습니다. 이날 행사는 올해 발굴한 국군장병 유해 824구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유해 9위에 대한 합동 안장식이라고 합니다. 행사가 진행될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관 실내에 들어서니 유가족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이미 도착해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 이날 합동 안장식에는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해 많은 장군들이 참석해 고인의 넋을 추모했습니다.
임충빈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진행된 이날 합동 안장식에는 주요 지휘관 및 참모, 고인의 한국전쟁 당시 참전 소속부대 대표, 유가족과 재향군인회 및 보훈처 관계자, 군악대, 의장대, 육군 군기단, 조총병, 영현 봉송병 등 37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개식사와 함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합동 안장식이 시작됐습니다. 제단위에 모셔진 고인들의 영현을 보니 가슴 한편이 먹먹해 집니다. 고인에 대한 경례에 이어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이 고인의 무공훈장을 유가족 한분 한분에게 전달해 드렸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철부지 어린이였던 고인의 친형제, 친지 등 직계 유가족들의 머리위에 어느새 하얀 서리가 내렸습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이날 화랑무공훈장이 전수된 故 전경섭 중위, 故 김태고 하사, 故 김용낙 하사, 故 김영철 일병은 당시 전시 상훈법에 따라 일선 사단장으로부터 약식증서만 교부받고 실제 훈장은 교부받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왜 고인들이 이제야 실제 무공훈장을 전수 받은 것일까요? 전투 중 뛰어난 무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훈장을 받지 못할 만큼 당시 전황이 급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고인들은 남다른 의협심과 애국심으로 전사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셨다고 합니다. 솔직히 저라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비록 무공훈장을 수여 받지는 못했지만 다른 4위의 호국선열들 역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희생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이 故 김용낙 하사의 동생 김용향(73세) 선생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날 전사한 故 김용낙 하사를 대신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고인의 동생, 김용향(73세) 선생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한동안 아무 말씀도 못하셨습니다. 故 김용낙 하사가 육군 5사단 소속으로 양구에서 치열한 격전 중 전사했을 당시 15살 청소년이었던 김용향 선생은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김용향 선생은 고인에 대해 “의협심이 남달랐고 전투 중 다리에 부상을 당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전사하셨다”며 “뒤늦게나마 형님의 유해를 되찾고 국립묘지에 모실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고 소회를 전했습니다.
↑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이 호국선열의 넋을 기리며 분향하고 있습니다.
무공훈장 수여 후 조사와 종교의식이 이어집니다. 잠시 짬을 내 보도자료를 살펴보니 고인들의 사연 하나 하나가 모두 가슴에 와 닿습니다. 유해발굴사업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중대장급 장교의 유해가 발굴된 사례라는 故 고희경 대위(육사 9기)는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1950년 8월 수도사단 17연대 2대대 중대장으로 임무 수행 중 30세의 꽃다운 나이에 전사하셨다고 합니다. 영월지역에서 전투 중 전사한 故 김영철 일병의 경우 부친이 시신을 수습하여 하동면 옥동리 사택 부근에 임시로 매장해 관리해 온 것을 발굴한 것이라고 합니다. 함안에서 발굴한 4위는 전쟁당시 유골함이 본가에 봉송되어 가야읍 혈곡리 마을 주변에 임시로 매장해 관리해 오던 것을 수습한 경우라고 합니다. 서울 상왕십리 소재 안정사 사찰에 보관된 유해 3위는 사찰 이전을 준비하던 중 국군 전사자 유골함이 발견되어 수습한 것으로 유골함 기록이 신원 확인에 결정적 단서가 됐다고 합니다.
↑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은 전몰장병 유해 수습과정에서 함께 발굴된 당시 무기들과 유품 등을 전시해 유가족 및 합동 안장식 참석자들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종교의식이 모두 끝났습니다.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의 추도사가 이어집니다.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은 이날 합동 안장식 추도사를 통해 “호국선열의 유해를 끝까지 찾아내 조국의 품에서 평안히 영면하실 수 있도록 하는 일이야 말로 군과 국민 모두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책무이자 무한책임의 국가사명”이라고 강조한 뒤 “전국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유해발굴활동에 정성을 다하고 범국가적 차원의 관심과 노력을 바탕으로 마지막 남은 호국선열 한 분까지 조국과 가족의 품에 모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 합동 안장식이 모두 끝났습니다. 봉송병들에 의해 고인의 영현과 무공훈장이 차례로 현충관 밖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은 전사자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화장된 전사자의 유골함을 병적에 기록된 본가로 최대한 봉송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피난을 떠나 전달 자체가 제한되는 상황이 발생해 읍·면 단위 지역사회에서 전사자의 유골함을 유가족 대신 받아 마을 주변에 매장하거나 사찰 등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피난을 떠났던 전사자의 유가족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오지 않거나 유골함과 관련된 기억이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지면서 그간 전사자의 유골함이 본의 아니게 방치되어 온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고인들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모시게 되어 다행입니다.
↑ 호국선열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육군 주요 부대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육군 군기단은 대한민국 육군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헌화 및 분향이 끝나자 조총발사 및 묵념이 이어집니다. 이제 모든 행사가 끝났습니다. 봉송병들이 차례대로 영현을 들고 고인들이 영면할 개별 묘역으로 이동합니다. 하늘에선 한 두 방울씩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절로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지난 2000년 유해발굴 사업을 시작한 이래 우리 군은 총 3719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며 이 가운데 국군 55위의 신원확인을 완료, 이날 합동 안장식까지 53위의 국군전사자를 국립묘지에 안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이름 모를 산야에 홀로 남겨진 13만 호국용사의 유해를 모두 찾아 국립현충원에 모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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