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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하는 남자친구, 구속하지 말라는 남자친구

군대에 있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내가 일병 말 개월 일 때, 사진을 전공했다는 후임 하나가 들어왔다. 피팅모델 여자친구를 둔 녀석이었는데, 폭설주의보가 내린 날에도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 여자친구와 통화할 정도로 열애 중이었다.

녀석이 우리 분대 막내인 까닭에 내가 도우미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하러 간다는 녀석 때문에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도우미는 늘 해당 병사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들으려고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 근처에서 담배 하나 피우고 있으면 녀석의 통화내용이 흘러나와 대충 무슨 대화를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카페? 누구랑? 남자 아니고? 바꿔 봐봐."
"왜 화장실에서 받아? 누구랑 있었는데?"
"집에 언제 들어가려고? 내가 세 잔 넘게 마시지 말랬잖아."



아 이 아름다운 녀석. 남들은 다 녀석이 여자친구와 알콩달콩한 대화를 할 거라 예상했지만, 난 녀석이 중증의 불안증과 집착, 의심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 녀석은 2박 3일간 연락두절되는 훈련을 나갔을 때 전화를 하지 못해 손을 떠는 금단현상을 보였고, 그 금단현상을 극복하고자 여자친구가 지켜야 할 '12가지 수칙' 같은 걸 군용수첩에 쓰고 있었다.

이 정도로 상대를 구속한다면 헤어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아마 여자친구 쪽에선 녀석의 이러한 모습들을 '사랑'이라 재해석해 받아들이는 듯 했다. 너무 하다 싶어 전화를 하러 가겠다는 녀석에게 "삼십 분 전에 했는데 또 해?"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지만,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길래 공중전화까지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떨어져 있는 것에 적응이 되지 않아 그런 거라 생각했고, 백일 휴가를 다녀오면 녀석이 괜찮아 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일 휴가에서 돌아온 녀석의 증상은 더 심해졌다. 저녁 10시, 취침을 위해 불을 다 끄고 누워도 녀석은 "지금 시간에 밖에선 술자리가 시작되고 클럽에 사람들이 넘치지 않습니까?"라며 뜬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계절이 세 번 바뀌도록 계속 되었다.

난 병장이 되어서 "오늘 반찬 뭐냐? 안 먹어." 따위의 멘트를 하고 있었고, 녀석은 소대의 실세가 되어 코 흘리는 꼬꼬마 후임들에게 "슬리퍼 정리 안 하냐? 군생활 편해?" 따위의 멘트를 하고 있었다. 녀석의 연애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안 하는 날이 생기고, 편지가 와도 예전처럼 그 자리에서 뜯어보는 게 아니라 관물대에 넣어두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뜯어서 확인을 했다. 휴가를 앞두고도 여자친구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연락해 놀러 갈 계획을 잡았다. 휴가에서 돌아와선 이런 말도 했다.

"여자친구가 너무 구속해서 진짜 죽겠지 말입니다.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영상통화를 걸어오고, 아 진짜 이상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믿지를 못하는지..."


올챙이 적 생각을 하란 얘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난 며칠 밤만 더 자면 사회인이 되기에 밖에 나가서 할 일 계획을 잡느라 바빠 그냥 두었다. 그저 녀석의 변화를 보며 '구속'이란, '사람'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보다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는 거라 생각했다.

메일로 도착하는 곰신들의 사연엔 구속하는 남자친구, 그리고 구속하지 말라는 남자친구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군대에 있다는 특성상, 보고 싶을 때 쉽게 볼 수 없으며 서로의 생활을 옆에서 지켜볼 수 없기에 '관심'의 표현이 '구속'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전화 통화만 안 되어도 큰 일 났다고 생각하고,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동안 그 문제에 상상력을 동원해 시나리오를 써 나간다. 그리곤 서로에 대해 '이럴 것이다.'라며 예측하고, 그 예측을 심증으로 굳혀 상대를 용의자 취급하는 것이다.

자, 그럼, 이처럼 구속하는 남자친구와 구속하지 말라는 남자친구의 대표적인 경우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적절한 해결방법에는 뭐가 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 구속하는 남자친구


우선, 구속하는 남자친구에 대해 사연을 보내는 곰신들에게는 '만약 군화가 이런 상황이라면?'이라고 생각해 보길 권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무언가를 하는 일에 있어 관대한 편이지만, 타인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두기 때문이다.

휴가시즌을 맞아 친구들과 바다로 놀러가는 것에 대해 남자친구가 반대한 일로 다퉜다는 곰신의 사연이 있었다. 전에 동창회에 나가는 것도 남자친구가 싫어하는 기색을 보여 나가지 않았고, 친구들과 클럽에 가면 늘 남자친구가 불안해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이별까지 생각한다고 하셨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군대가 아닌 사회에 있는 나도 불안해 할 요소가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남자들과 춤추러 클럽에 가는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곰신은 음악이 좋을 뿐이고, 그렇게 어울리며 술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좋은 거라고 해 두자. 그렇다고 해도 쉽게 마음을 놓을 순 없다. 술이 있고, 연애에 목마른 이성이 있고, 스파크가 일어나기 좋은 분위기가 있지 않은가. 실제로 몇몇 사연들에서는 클럽에서 만난 '오빠'와 '군화' 사이에서 갈등하는 곰신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클럽에 간다고 무조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화창한 날 보다 비 오는 날 자동차 사고 날 확률이 높은 것처럼, 클럽에선 그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아주 간단하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곰신이 현재 유학을 가 있는 상황인데, 남자친구가 친구들과 클럽에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름이 '이해심'인 여자친구라면, "응 재미있게 잘 놀고 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곰신들은 "뭐? 클럽? 클러어어어업?" 이런 반응을 보일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한 쪽은 "클럽이 어때서?"라는 이야기만 하고, 다른 한 쪽은 "그렇게 가고 싶냐?"라는 이야기만 한다면 결론이 안 나오는 감정의 소모전만 계속 될 뿐이다. 이로 인한 대화를 할 때에는 먼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고, 그렇게 생각해도 같은 결론이라면, 그 생각을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해 보자. 친구들과 바닷가에 가겠다는 말만 툭, 던지는 것 보다는 상대방의 입장까지 배려해서 낸 결론을 말해주자는 거다.


2. 구속하지 말라는 남자친구


상대의 구속에 대해선 '믿음'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방법인데, 이것을 그저 "참견 하지마."따위의 말로 해결하려는 사연들이 많았다. 연애 기간이 길어지며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편안해 진 것인데, 그것을 상대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특히 한 곰신의 사연에선, 한 쪽이 구속하고 다른 한 쪽은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막말이 등장했다.

(남자친구가 휴가 나와 친구들과 술 마시는 중)

여자친구 - 아직 술집에 있는 거야?
남자친구 - 그럼 술집이지 어디야. 내가 있다가 전화 한다고 했잖아.
여자친구 - 두 시간이 넘었는데도 연락 없으니까 걱정돼서 그러지.
남자친구 - 내가 전화 한다고 했으면 좀 기다리고 있어. 내가 전화 안 해?
여자친구 - 알았어. 자리 옮기게 되면 연락해줘.
남자친구 - 아 진짜. 너 이럴 때 마다 난 기분 망친다니까. 의심 좀 하지마.
여자친구 - 내가 무슨 의심을 해?
남자친구 - 내가 다른 데 갔을까봐 전화한 거잖아. 의심 좀 하지 말라고.
여자친구 - ......



가장 강도가 약한 사연임에도 불구하고, 위의 대화를 읽으며 짜증이 솟구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읽자마자 머릿속에 스치는 시나리오는, 이제 곰신은 점점 '확인하고 싶어도 확인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게 되고, 남자친구는 여자친구가 의심을 준비하는 모습만 보여도 윽박지를 것이다. 결국, 막말이 오가고 감정을 날카롭게 상대에게 던지는 사이가 되면, 남은 건, 이별이다.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드는 것만으로 연애를 시작 하더라도, 연애 중에는 서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을 보게 되기 마련이다.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각자 가지고 있는 잣대도 다르다. 게다가 '믿음'이라는 것은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에서 자라나기 마련이며,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더라도 '의심'은 언제 어디서든 자랄 수 있는 잡초처럼 자라난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쉽게 짜증을 낸다거나 함부로 대하는 일이 많다면, 둘의 연애는 무엇 때문에 지속되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길 권한다. 이해도, 배려도, 믿음도 없는 연애는 결국 의무적인 만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비슷만 마음의 중량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둘 중 한 명이 상대의 비밀번호를 알려 하거나, 문자를 확인하는 등의 모습으로 집착을 보이기도 하고, 어느 쪽은 상대를 방치해 두기도 한다. 매뉴얼의 서두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는 '사람'의 문제라기보다는 '상황'의 문제이므로, 그 '상황'을 바꾸는 것에 주력하자. 사람 자체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상황은 작은 변화에도 쉽게 바뀌니 말이다.

상대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판정을 내린 뒤라면, 무슨 말을 해도 별 소용이 없어진다. 앞으로 상대가 벌이는 모든 행동들이 그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판결로 흘러가고, 인생의 전부인 것 같던 그 사람이 이제는 의무적으로 돌봐야 하는 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그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판정을 보류해 두길 바란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좋은 학점 하나 받기 위해 밤을 새면서, 사랑은 왜 몇 마디 말로 해결하려 하는가. 시무룩함이나 실망이라는 무기들은 내려놓고, 진심을 꺼내 상대와 상의를 하자. 그게 뿌옇게 흐려 염려스럽던 부분들을 다시 환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