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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상 최대의 작전

너무나 길었던 그날의 24시간 The Longest Day

(글: 군사칼럼리스트 김대영)

 

 

지상 최대의 작전 (The Longest Day)
감독: 켄 아니킨(영), 앤드류 마틴(미), 베른하르트 비키(독)
출연: 존 웨인, 로버트 미첨, 숀 코넬리, 진 핵크만, 헨리 폰다 
개봉: 1962년 10월 4일

 

위사진)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은 2차 대전의 승패를 결정지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그런 전쟁 영화로  총 런닝타임 180분의 대자영화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영화로 만나다.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은 2차 대전의 승패를 결정지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그린 전쟁영화로 총 런닝타임 180분의 대작영화이다. 미국의 20세기 폭스 필름이 제작하고,영국의 켄 아나킨, 미국의 앤드류 마턴, 독일의 베른하르트 비키가 공동으로 감독하였다.


출연진으로는 당대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마치 각국에서 소집영장이라도 받은 듯 총 출동하였다.
존 웨인, 로버트 미첨, 헨리 폰다, 리차드 버턴, 숀 코넬리등이 참여했다. 지난달 살펴보았던 머나먼 다리의 광란의 캐스팅도 살펴보면 영화 사상 최대의 작전이 그 시발점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인 1,200만 달러를 투입하여 1만, 1000대의 전투기와 400척의 전함을 동원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재현한 시네마스코프의 역작이며, 전쟁 세미다큐멘터리 영화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방대한 스케일에 걸맞게 당대의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이 영화에서 배우들이 차지하는 몫은 크지 않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상륙작전 자체이며, 작전이 펼쳐진 처음 24시간을 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영화는 최초 흑백으로 제작되었으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5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1,200만 달러를 들여 6개월이 넘는 작업 끝에 컬러로 복원하였다. 1963년 제 3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흑백 촬영상과 특수 효과상을 받았으며, 골든 글러브 흑백촬영상을 받았다.

 

위사진)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상륙작전 자체이며, 작전이 펼쳐진 처음 24시간을 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위사진) 출영진으로는 당대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마치 각국에서 소집영장이라도 받은 듯 총 충돌하였다. 존 웨인, 로버트 미첨, 헨리폰다, 리차드 버턴, 숀코넬리 등이 참여했다.

 

 

The Longest Day


코넬리어스 라이언이 쓴 동명의 다큐멘터리 소설 가장 긴 날(The Longest Day)을원작으로 하며 저자와 로메인 게리등이 각색하였다. 영화의 원제인 가장 긴 날(The Longest Day)이라는 원 제목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유럽 대륙을 점령하고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하던 서유럽의 독일군 방위사령관은 바로 북아프리카의 영웅 롬멜 장군이었다. 그는 서유럽 해안에 철통 같은 방어선 즉 대서양 방벽을 구축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이 계획은 완전하게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롬멜은 상륙작전 개시 후 24시간이 승패를 좌우하는 순간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날은 독일군에게나 연합군에게나 가장 긴 하루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그린 작가 코넬리어스 라이언은 롬멜의 이 말을 인용해 그의 책에 가장 긴 날이라는 제목을 붙였고,영화도 제목을 그대로 채택한 것이다. 원작자인 코넬리어스 라이언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현장에 있었던
저널리스트로서, 그 하루 동안 작전에 참여한 장성들과 사병들 독일군과 레지스탕스 시민 등 많은 사람들이 겪은 상황을 세세하게 묘사하여 사실감을 더했다.

 

여기에 독일군은 독일어로 말하고 프랑스 사람은 프랑스어로 말하는 언어의 사실감도 당시의 할리우드 영화와 크게 구별되는 점으로 이루 제작된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위사진) 영화는 최초 흑백으로 제작되었으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5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1,200만 달러를 들여 6개월이 넘는 작업끝에 컬러로 복원하였다.

 

 

오버로드 작전

 

1941년 독소전 개전 이래 독일의 주력부대를 맞아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던 소련은 영국과 미국 양측에 프랑스에 제2전선을 구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영국 수상 처칠을 중심으로한 영국의 신중론 때문에 실현이 지연되었다. 1943년 11월 말 미국·영국·소련 수뇌들은 테헤란 회담에서 1944년 5월 1일까지 프랑스에서 상륙작전을 실행할 것을 확인하였다. 바로 이 상륙작전이 오버로드 작전이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 사령관인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장의 총지휘하에 미국 제1군, 영국 제2군, 캐나다 제1군 등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였다.상륙 당일은 수송기 2,316대와 글라이더를 동원하여 공수부대를 독일군 배후에 투하시켜 거점을 확보하고,그 엄호 아래 항공기 총 1만 3000대와 함선 6000척을 동원하여 7개 사단이 상륙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7월 2일까지 인원 약 100만 명, 물자 약 57만 톤, 각종 차량 17만 량 등이 상륙하였다.

 

상륙 초기의 3주간 연합군의 손해는 사망자 8,975명, 부상자 5만 1796명이고, 독일군 포로는 약 4만 1000명이나 되었다. 이 작전으로 전쟁 초기 서부전선에서 패하여 유럽대륙으로부터 퇴각한 연합군이 독일 본토로 진격하기위한 본격적인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영화 속에서 살펴보듯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복잡하고 방대한 작전으로 위험요소도 많았으나, 무엇보다도 기습에 성공함으로써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그리고 그 기습은 전투전에 치밀한 준비와 창의력 및 인내심의 작품이었다.
작전 첫날 적과 접촉도 없이 상륙한 많은 병사들은 맹훈련을 거듭하고 죽음을 각오하기도 했던 이날의 승리가 어쩐지 싱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연합군측의 보안 유지가 철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공 및 제해권 장악은 연합군 기동을 보장하고 독일군을 요지부동 상태로 묶어놓았다. 마지막으로 독일군은 연합군의 양동작전과 그들 자신의 편견으로 말미암아 파드칼레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노르망디에 대한 방어태세를 소흘히 한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위사진) 1943년 11월 말 미국,영국,소련 수뇌들은 테헤란 회담에서  1944년 5월 1일까지 프랑스에서 상륙작전을 실행할 것을 확인하였다. 바로 이 상륙작전이 오버로드 작전이다.

 

위사진) 작전 첫날 접촉도 없이 상륙한 많은 병사들은 맹훈련을 거듭하고 죽음을 각오하기도 했던 이날의 승리가 어쩐지 싱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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