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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14>캐나다 18세 이병의 ‘한국전 13개월’

 

“가평서 중공군에 포위… 36시간 폭격에 소총 하나로 버텨”
남침 소식듣고 다음날 자원
날 도와주던 한국인 인부 폭사
함께 근무한 동료 귀국뒤 자살
방황 끝 재입대 30년 군생활
“내겐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킴’ 가족을 찾을 수 없을까요? 꼭 만나야 하는데…. 그래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캐나다 오타와에 있는 주캐나다 한국대사관에서 만난 6·25 참전용사 빌 베리 소령(78)은 ‘킴’ 얘기부터 꺼냈다. ‘킴’은 6·25전쟁 당시 부대의 잡일을 도와주던 18세의 한국인 인부로 빌 소령은 대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 ‘6·25’는 소중한 두 사람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그를 도왔던 킴과 캐나다에서 함께 파병된 친구 존 마틴이 그들이다. 6·25전쟁에 이등병으로 참전한 베리 소령은 귀국 후 한때 분노와 좌절을 겪는 등 극심한 전쟁후유증에 시달렸다.》

○ 1951년 4월 가평전투


1950년 여름 오타와 인근의 아버지 농장에 있던 빌은 6·25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행을 결심한다. 아버지와 삼촌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는데 소련 공산당이 남한을 침범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다음 날 자원했어요.”

빌은 캐나다퍼트리샤보병부대(PPCLI)에 입대해 미 워싱턴 주 포트루이스 요새에서 파병훈련을 받았다. 일본에서 추가훈련을 거친 뒤 1951년 4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연합군이 어려움을 겪던 가평전투에 투입됐다. 중공군의 반격으로 서울이 다시 함락될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캐나다군과 호주군은 경기 가평계곡을 둘러싸고 중공군 6000명과 대치하면서 혈투를 벌였다. 4월 24, 25일 이틀 동안 중공군에게 포위된 연합군은 밤새 이곳을 수호해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막았다. 이 전투에서 캐나다군 10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다쳤다.

“36시간 동안 폭격이 이어졌어요. 소총 하나로 버텼는데 무력하다는 것을 절감했죠.”

한 방씩 쏘는 소총은 연발하기 어려웠고 발사 때마다 조준을 해야 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가평전투 후 그는 상관에게 집요하게 요구해 무게가 18파운드나 되는 ‘브렌 건(경기관총)’으로 바꿨다. 이 총은 한 사람이 탄창을 따로 드는 2인 1조가 돼야 발사할 수 있다. 훈련 동기생인 존 마틴이 탄창을 들고 다녔다.

○ 1951년 겨울 철원계곡의 ‘악몽’

가평전투가 끝난 뒤 배치된 곳은 강원 철원계곡. 무엇보다 살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추위가 고통스러웠다. 동굴에서 담요 하나로 버티기도 했지만 견디다 못해 벙커를 만들기로 했다.

“킴이라는 18세 부대 도우미가 있었어요. 부대 일을 도와주는 수당으로 하루에 주먹밥 1개를 받았지요. 어느 날 내가 킴에게 터키 고기(칠면조)를 주었더니 다음 날부터 나를 ‘터키, 터키’라고 부르며 잘 따랐지요. 내가 벙커를 만들던 날이었어요. 잠시 쉬는 사이에 킴이 기둥으로 쓸 나무를 들고 올라왔는데 갑자기 ‘휘릭∼’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느낌이 안 좋아 ‘조심해!’라고 고함쳤어요. 킴이 있는 곳에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큰 웅덩이가 하나 파였고 킴은 그 자리에서 죽었어요.” 함께 생활한 지 3주일 만이었다.

“전부 내 잘못이었습니다. 죄책감을 떨칠 수 없어요. 일을 시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베리 소령은 말을 잇지 못했다. “요즘도 킴의 목소리가 들려요.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라도 하면 ‘터키, 천천히(Slow down)!’라고 귓가에 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려요. 수호천사처럼 말이지요.”

○ 절친한 친구 존의 자살

그는 파병 13개월 후인 1952년 5월 귀국했다. 생활은 엉망이 됐다. 만나는 사람 아무에게나 신경질을 부렸고 걸핏하면 사람을 때렸다. 친구들은 그가 6·25전쟁에 참전했는지도 잘 몰랐다. 당시 캐나다 사람들은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베리 소령에게 전쟁의 기억은 나날이 새로웠다. 전쟁터에 널브러진 중공군 시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중공군과 밤새 총격전을 하다가도 다음 날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체를 수습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시체가 너무 많아 중공군이 시체 수습을 포기하고 가 버린 적도 있어요. 부대장 지시로 중공군 시체를 뒤져 이름을 찾는데 가족과 여자친구 사진, 연애편지, 부적 같은 것들이 나왔어요. 무자비한 이 중공군들도 나랑 똑같은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순찰을 같이 돌던 친구가 나와 2인 1조로 브렌 건을 쏘던 존 마틴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틴은 귀국 후 다시 군에 입대한 뒤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부대로 돌아오는 지프에서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방황하던 빌에게 존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대학을 마친 베리 소령은 1955년 군인이 돼 1985년까지 30년 동안 군인의 길을 걷는다.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에서 평화유지군으로 근무한 뒤 1985년 소령으로 은퇴했다. 인터뷰 당시 주캐나다 한국대사관에는 천안함 침몰 장병의 분향소가 마련돼 있었다. 그는 “너무 슬프다”며 거수경례를 했다. “젊은 친구들이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북한 소행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글·사진·오타와(캐나다)=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79세 참전용사 우즈씨 ‘한국전’ 책 낸 까닭은
“잊혀져가는 전쟁 안타까워 집필… 한국 발전상 보며 큰 자부심 느껴”▼

6·25전쟁 참전용사인 존 우즈 중위(79·사진)는 지난해 12월 책 한 권을 썼다. ‘한 젊은 장교가 한국전쟁에서 겪은 일화(Episodes: A Young Officer in the Korean War 1951-1952)’라는 제목이다.

“가족과 친구들이 이제 한국전쟁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조언했어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책상에 앉아 단숨에 썼어요. 더 늦기 전에 다른 참전용사들도 책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캐나다에서 한국전쟁이 잊혀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는 6·25전쟁 발발 당시 캐나다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한국전이 터졌을 땐 캐나다에선 전쟁에 대한 반감이 많았어요. 제2차 세계대전에 6년 동안 시달렸기 때문이었죠.”

1950년 6·25전쟁 참전 당시 그는 20세의 중위였다. 1951년 3월 부산에 도착했을 때 참담한 상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전쟁고아가 사방에 널려 있었고 민간인과 농민의 삶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탄약과 식량 등 보급이 아주 부실했습니다. 군인들에게 참호를 만드는 방법을 적은 책자가 한 권씩 주어졌는데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연방에서 만든 것이었어요. 당시 보급품은 티셔츠와 바지, 총과 탄창밖에 없었습니다.”

적군인 중공군에 대한 연민의 감정도 드러냈다. “중공군 포로를 붙잡아놓고 보면 농민이나 매한가지였어요. 마구잡이로 징집하는 바람에 농민에게 총 한 자루 쥐여주고 전쟁터로 내보낸 겁니다. 운동화를 신은 중공군이 많았고 전쟁터에서 배고파 쓰러지는 경우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중공군이 몰려 있는 곳을 골라 집중 포격해 모두 사살해도 똑같은 수의 인원이 다시 배치됐지요. 이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었습니다.”

우즈 중위는 “시시각각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전쟁에 참전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우리는 한 나라를 구했다. 한국전쟁은 정말 값어치 있는 전쟁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6·25전쟁이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많은 캐나다인은 캐나다가 참전한 전쟁을 꼽으라고 하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꼽을 뿐이에요.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1970년 한국을 다시 찾았을 때 그는 서울프라자호텔에 묵었다.

“호텔에서 내려다본 성벽(덕수궁)은 내가 중공군을 추적한 기억을 되살렸어요. 바로 그 길이 내가 중공군을 미행한 장소였습니다.”


▼“순찰중 지뢰 ‘펑’… 부대원 7명 부상”▼
■ 보훈병원서 만난 브렌넌 씨

‘207호 레이몬드 브렌넌.’

오타와에 있는 보훈병원 ‘펄리 리도 퇴역군인 건강센터’에는 6·25전쟁 참전용사 30명이 요양하고 있었다. 6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휠체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참전용사들이다. 브렌넌 씨(82·사진)도 그중 한명.

지난달 27일 기자가 찾은 브렌넌 씨 입원실 문 앞에는 6·25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받은 메달과 사진들이 진열돼 있었다. 진열대에 있는 훈장을 보고 참전용사 병실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이곳에 입원한 환자 400명 가운데 250명이 참전용사였다.

그는 “6·25전쟁이 터졌을 때 아무 주저 없이 한국행을 선택했어. 당시 미혼이었고 자식도 없었지”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18개월 동안 탱크를 운전했다.

“밤에 우리 부대가 언덕에 있을 때 순찰병이 지뢰를 밟는 바람에 7명이 부상했지. 하지만 부대엔 의무병이 한 명밖에 없었지. 정말 열악한 상황이었어.”

그는 휴전회담 중에도 전쟁은 계속됐다고 회고했다. “가평 동쪽에 있는 256전선에 있으면서 탱크 안을 벗어날 수가 없었어. 용변이 급하면 탱크 밑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내려가 해결했지.”

캐나다 보건복지부와 보훈처는 오타와 내 3곳의 보훈병원을 통합해 이 병원을 1994년 건립했다.

글·사진·오타와(캐나다)=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