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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11> 콜롬비아인들이 갖는 한국전 의미

《“코리아의 자유를 위해 피 흘리며 쓰러진 친구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지난달 23일 정오 남미 콜롬비아 보고타 시내 베라크루스 성당. 가톨릭 국가의 수도 중심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성당의 본당 의자마다 태극기와 콜롬비아 국기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수백 명의 콜롬비아인들이 좌석은 물론 복도까지 가득 메운 가운데 ‘불모고지(Old Baldy) 전투 희생자 추모 미사’가 시작됐다.

57년 전 이날 한국 땅에서 쓰러져간 젊은이들을 추모하는 신부의 강론이 이어졌다. “오늘 우리가 추모하는 친구들은 형제국가인 한국자유를 위해 싸우다 쓰려졌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부활했듯이 그들의 희생은 한국과 콜롬비아가 형제국가로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거름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형제국가”

매년 4차례 기념행사… 시민들도 “코리아” 하면 반겨


국방부에 만든 기념공원
“한국서 동아일보기자 왔다”… 보안구역 이례적 공개

미사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양국 국기가 꽂혀 있는 대형 조화를 앞세우고 성당 밖으로 행진했다. 노구를 이끌고 온 참전용사들과 전사자 유족들은 부둥켜안고 인사를 나눴다. 성당 외벽에는 6·25전쟁에서 숨진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콜롬비아인들에게 ‘코리아’란 이름은 기자가 보고타에 도착하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 중요한 의미로 자리 잡고 있었다. 콜롬비아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유엔의 파병요청에 호응했다. 보병 1개 대대와 해군 프리깃함 등 총인원 4314명을 보내 전사 143명, 실종 65명, 부상 567명의 인명피해를 봤다. 6·25전쟁은 콜롬비아가 국경 인근의 자잘한 분쟁을 제외하고 20세기에 젊은이들을 외국에 보낸 유일한 전쟁이었다.

콜롬비아 병사들은 미군 24사단 예하에 편입돼 금성 진격작전(1951년 10월), 김화 400고지 전투(1952년 6월), 볼모고지 전투 등 굵직한 전투들에서 주역으로 뛰었다. 군율이 엄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났으며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모토를 지켰다.






참전 후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났지만 콜롬비아인들은 참전의 의미를 기리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3월 불모고지 전투 기념식(참전용사회 주최), 6월 기념식(대한민국 무관부 주관), 10월 금성전투기념식(참전용사회 주최), 11월 파병기념식(파병해군회 주관) 등 공식 기념행사만 매년 4차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참전용사들은 물론 거리와 식당에서 만난 일반 시민들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한국은 형제국가”라며 반겼다.

추모미사 이틀 뒤엔 보고타 시내에 있는 국방대 경내에서 ‘불모고지 전투 5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국방대의 정문을 통과하자 거대한 석가탑이 눈에 들어왔다. 2003년에 한국정부가 기증한 석가탑 모양의 참전기념탑이 대학 경내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날 기념식은 참전용사 100여 명과 콜롬비아군 지휘관들, 홍성화 주콜롬비아 한국대사, 김근준 무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됐다.

이날 오후 콜롬비아 국방부는 한국에서 동아일보 기자가 왔다는 소식에 보안구역인 국방부의 문을 열어줬다. 국방부 건물은 ‘ㄷ’자 모양으로 배치돼 있는데 그 안의 잘 가꿔진 정원에도 대형 6·25참전 기념물이 세워져 있었다. 콜롬비아 정부가 2003년 3월 23일 건립한 야산 모양의 대형 조형물엔 OLD BALDY(불모고지)와 KUMSONG(금성)이란 글자가 선명했다. 여러 나라의 기념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6·25참전 기념물이 설치돼 있다.

안내를 맡은 콜롬비아 병사에게 기념물 동판에 새겨진 문구의 통역을 부탁했다. 6·25전쟁 당시 미군 24사단장이었던 브라이언 블랙스헤드 소장의 글이었다.

“나는 봤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병사들이 싸우는 것을. 콜롬비아 병사들은 내가 일생에 걸쳐 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용감했고 자랑스러웠다.”


:불모(不毛)고지 전투:

1953년 3월 23∼25일 지금은 비무장지대(DMZ) 너머 북한 지역인 275고지(경기 연천군의 북쪽 방향)에서 콜롬비아군 대대가 중공군 제141사단 제423연대와 치른 전투. 사흘간 콜롬비아군 95명이 숨지고 30명이 실종됐으며 중공군은 600명가량 숨졌다. 1952년 6∼8월 미군이 중공군과 벌인 불모고지 전투와는 별개다.

■ 참전 용사가 전하는 전투

“중공군 물밀듯… 참호속 항복할까 자폭할까 고민”


“정확히 57년 전 오늘이었어. 중공군의 포격이 쏟아진 뒤 쓰러진 병사들을 향해 뛰어갔어. 시신을 옮기는데 얼굴이 낯익은 거야. 어릴 적 친구였어. 워낙 사상자가 속출하니까, 병력 보충이 연거푸 이뤄졌는데, 친구는 그날 신규 투입되자마자 변을 당한 거지.”

페드르 에르난데스 씨(78)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구 반대편 낯선 나라의 민둥산인 불모고지에서 기적처럼 어릴 적 친구와 재회했는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엔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는 그는 “요즘도 술 한잔 먹으면 그 친구가 생각난다”며 씁쓸해했다.

불모고지 전투 57주년 기념일인 지난달 23일 찾아간 한국전참전용사회는 보고타 시 남쪽의 가난한 고지대 마을에 있었다. 낡은 건물이었지만 내부에는 6·25전쟁 관련 사진과 양국 국기, 기념물 등이 단정히 정리돼 있었다. 동아일보의 6·25참전국 탐방 취재 소식을 들은 노병들은 정성스러운 전통음식을 준비한 채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난도 고메스 용사회 회장(74)은 고교 3학년에 재학 중인 16세 때 6·25참전을 자원한 소년병 출신이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몰랐지만 젊었기 때문에 모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를 해치는 걸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모병관을 찾아갔더니 ‘더 자란 다음에 오라’며 퇴짜를 놓았지만 사흘 연속 찾아가니 결국 받아주더군.”

역시 고교생이던 16세 때 자원했다는 오를란도 가르시아 부회장(74)은 “어린 병사들이 많아서인지 철모를 엉덩이에 깔고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며 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실전은 기억하기 괴로울 만큼 치열했다고 노병들은 입을 모았다.

“중공군이 눈앞에 보일 만큼 지척에서 대치했어. 밤낮없이 포격이 계속되고 중공군은 빨간색 목도리를 맨 채 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돌진해왔지. 옆에 있던 동료의 하반신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리더군. 나도 다리에 파편이 박혔지. 기관총마저 고장 나 참호 속에서 다들 기도만 했어. 항복할까, 자폭할까 논의하다가 해가 뜨자 자폭용 수류탄을 나눠들고 참호 밖으로 나왔어. 그런데 ‘담배 달라’는 영어가 들리는 거야. 미군이 온 거지.”(카를로스 프랭크 씨·76세)

6명의 노병에게 “참전을 후회해 본 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다들 단호히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인간적 성숙에 큰 도움이 됐으며, 한국의 놀라운 발전을 보면서 “아주 작은 부분일지언정 나도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소령으로 참전했던 알프레도 데만시아 준장의 부인 올가 데만시아 씨(77)는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9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은 생전에 한국 얘기를 정말 많이 했는데 특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게 자랑스럽다고 강조하곤 했다”고 말했다.

■ 에스피노자 참전장교회장

“지구 반대편 파병, 반대 강했지만 한국 민주주의 위협 외면 못했다”


콜롬비아에는 사병 출신 모임인 한국전참전용사회(회원 707명)와 참전장교회(회원 32명)가 활동하고 있다. 참전장교회 라울 마르티네스 에스피노자 회장(82·사진)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콜롬비아 정부가 6·25 참전을 결정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콜롬비아는 게릴라들 때문에 ‘내 코가 석자’인 상황이었고 ‘한국에 가봐야 총알받이만 될 뿐이다’ ‘지구 반대편에 왜 우리 젊은이를 보내느냐’는 등의 반대론도 강했다. 하지만 콜롬비아는 200년 넘게 민주주의 전통을 지켜왔으며 국제적 약속과 책임을 다하는 나라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소련의 위협으로 전 세계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터졌는데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생존 참전 용사는 1200명가량으로 추산되는데 상당수가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고타 시내 서쪽 빈민가에 사는 참전용사의 부인 마리아 바제스테로스 씨(49)는 “38세 연상인 남편은 한국에서 중상을 입어 4년 반 동안 병원 신세를 졌고 제대 후 이발사로 일했다”며 “2년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참전용사 부인모임에 나가는데 참전자 가족들에 대한 지원이 없어 생계가 어렵다”고 말했다.

기자를 만난 참전자 가족들은 콜롬비아 정부의 지원 부족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했다.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도움의 손길을 펴주길 기대하는 시선도 느껴졌다. 콜롬비아는 남미에서 인구와 면적이 3번째로 큰 나라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 수준이다.

글·사진=보고타 이기홍 기자 sechepa@donga.com